brunch

매거진 우편함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이로운 Feb 20. 2017

당신에게 그림으로 뻗어 갑니다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할지 모르겠군요. “안녕.”이라고 말하기가 좀 낯선 시간입니다. 오전 3시 12분이거든요. 당신, 자고 있겠죠, 아마. 누구라도 자고 있을 시간이네요. 

   나는 계속 깨어 있었어요. 한 번도 잠들지 않고, 이 새벽까지 곧장 왔어요. 새벽, 내겐 익숙하지 않은 시간입니다. 이 시간 속에서, 나는 아주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너무 조용해서, 귀가 약간 멍멍하네요. 

   나는 이 절대적인 고요 속에 앉아, 당신을 생각합니다. 이 묵직한 적막 때문에, 내 생각의 소리가 마치 목소리처럼 느껴지는군요. 편지 쓰고 있는 이 연필 소리는 또 얼마나 크게 들리는지. 숨소리에 마음까지 다 묻어 나오는 것 같아, 호흡을 얼마나 조심하게 되는지.

   꿈자리는 아늑한가요.

   이 편지가 당신을 조금 놀라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초저녁만 돼도 눈이 끔벅끔벅 감기는 사람이, 뭐? 오전 3시 12분?” 하며, 당신은 눈살을 살짝 찌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여태 잠들지 못한 나 때문에, 당신이 나를 약간 걱정하기도 할까요. 

   또 철없이 당신 걱정을 바라네요. 걱정보다 사랑을 주고 싶다는 당신인데. 나는 왜 당신이 해 주는 걱정이 사랑만큼 좋은가요.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지난 가을이었나요. 당신이 내게 말했었죠. 지어진 지 100년이 넘은 돌담 옆에서, 당신이 내게 말했었죠. 인생은 그림이라고.

   그 말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초저녁쯤에요. 노트에 메모하다가, 지인 전화를 받고 난 뒤였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통화할 때마다 낙서하잖아요. 아까도 통화 내내 이런저런 그림을 긁적거렸습니다. 통화 끝 무렵부터는, 노트 한 군데에 점을 계속 찍었어요. 한 군데에 계속. 점 위에 점을. 그 점 위에 또 점을.

   내가 그러고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그 말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인생은 그림이라던 당신 말이.

   내 인생은 그림이 아니라 점이었음을, 그 순간 뼈아프게 알아차렸습니다. 

   나는 삶이라는 연필을 든 채로, 점만 열심히 찍어댔습니다. 지금껏 그래 왔습니다. 점을 벗어나 선을 긋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처음 찍은 점 속에 갇혀 있기만 했습니다. 누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런 나를, 당신은 꿰뚫어 보고 있었던 건가요. 무한히 뻗어 나가는 그림이 되어도 될 인생에서 점만 찍으며 살아가는 나를. 그토록 한 가지 틀에 박혀 지내는 나를. 그래서 그렇게 말했던 건가요. 인생은 그림이라고.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라고.

   아니면, 혹시 당신도 나와 같나요. 당신도 점의 삶을 살아 왔나요. 그래서 그렇게 말했던 건가요. 인생은 그림이라고. 그 말은 당신 내면으로 던지는 다짐이었나요.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려고.    





   아무튼, 이게 당신에게 할 말이에요. 당신에게 이런 내 깨달음을 말해 주고 싶었어요. 이렇게 비좁은 점 속에서 살아온 내 생애를 보여 주고 싶었어요. 너무 부끄러워서 숨기고 싶은 한편으로, 다 드러내 보이고 싶었어요. 당신에게만큼은. 오늘까지의 나를. 내 전부를.

   이 전부를 어떤 말로 전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지금입니다. 지금은 오전 3시 26분입니다. 


   내가 왜 이토록 작은 점 속에 틀어박혀 살아왔는지, 나는 오래 생각했습니다. 저녁나절부터요. 한 시간쯤 생각한 때였습니다. 내 머릿속으로 한 가지 이유가 떠올랐습니다. 두려움. 나는 두려웠던 겁니다. 그래서 점 안에 쪼그리고 앉아 있기만 한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한 거예요. 

   뭐가 두려웠냐구요? 이 인생에서 내가 정말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면, 그 그림을 본 누군가 혹시라도 떠나갈까 봐. 그 ‘누군가’에 내 가족이, 친구가, 당신이 포함될까 봐. 나는 두려웠습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 내린 선택이 내 곁의 사람을 떠나게 할까 봐. 나는 겁에 질렸습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난 직후였습니다. 내가 방금 생각한 이 두려움이 가짜 두려움임을, 나는 문득 알아차렸습니다. 이 두려움은 내 진짜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내세운 가짜였습니다.

   그럼 내 진짜 두려움은 뭐냐구요? 뭐가 그렇게 두려워서 인생을 수동적으로 살아왔느냐구요?

   나는 내 안의 화가를 믿지 못했습니다. ‘참된 나’라는 화가의 역량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 화가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웠습니다. 끝내는 내가 흉한 그림을 그리게 될까 봐. 내 온 마음을 다해 사는 인생이 추한 모습이기만 할까 봐. 나는 스스로를 꽁꽁 묶었습니다. 아무것도 못하게 했습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가 자정쯤이었습니다. 이윽고, 나는 새로운 생각을 시작했습니다. 

   꼭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야 하나? 세상 모두를 반하게 하는, 완전히 아름다운 그림 같은 건 존재할 수 없는데? 나부터가 피카소와 고흐의 그림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데? 다빈치의 『모나리자』에서 별다른 기품을 느끼지 못하는데? 인생이라고 뭐가 다를까? 세상 모두를 만족시키고 감동시키는, 완전히 아름다운 삶 같은 건 존재할 수가 없잖아?

   아름다운 인생처럼 보이려고 애쓸 필요가, 전혀 없었잖아? 타인의 인생에 대한 우리 관점은 취향의 반영이었을 뿐, 옳고 그름을 가르는 잣대가 아니었잖아? 게다가, 옳고 그름 따위는 애초에 없었잖아? 예술에나 인생에나.

   이 생각을 끝으로, 나는 한 시간 내내 된통 멍했습니다.    





   지극히 당연하던 것들이 가장 당연하지 않은 느낌으로 올 때, 비로소 진정한 깨달음이 시작되는 것이었음을, 당신도 알고 있었나요. 남 눈치 볼 것 없이 되는 대로 살라던 그 흔한 말을 생애 첫 옹알이처럼 낯설게 머금으며, 나는 비로소 이 말을 깨달았습니다. 

   남 눈치 볼 것 없다. 되는 대로 살면 된다. 진짜다. 인생 어귀마다 만나는 수많은 비평가는 사실 비평가가 아니었다. 인생에 ‘절대적인 비평’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까. 가짜 비평가가 하는 말에 주눅들 필요 없다.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그저 한 사람, 한 사람의 관람객일 뿐이다. 비평가 같은 건 없다.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내가 착각했을 뿐이다. ‘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누군가의 말을 ‘너는 틀렸다.’는 말로.    


   오전 3시 47분입니다. 잘 자고 있나요. 보고 싶네요. 

   아까 당신과 잠깐 나눈 통화 내용이 귓가에 어른거립니다. 당신이 전화 받자마자, 내가 말했었죠. 내일(그러니까 오늘) 아침에 잠깐 보자고. 전해 줄 게 있다고. 내 말 들은 당신은 조그만 목소리로 웃었습니다. 웃음 다 추스른 뒤에는 “전해 줄 거? 뭔데? 어디 멀리 떠난다는 소식만 아니면, 다 선물이라 생각할게.” 하고 말했습니다.

   이거예요. 이 편지. 당신에게 전해 주겠다고 한 거. 

   그리고 당신에게 줄 게 한 가지 더 있어요. 내 인생 첫 획을 그어 나가는 순간. 그 순간을 당신에게 주고 싶습니다. 내 마음 가는 대로 살기 시작하는 첫 날 아침을 당신과 보내고 싶어요.

   이따가 우리 산책할까요? 당신 자주 가는 카페 갈까요? 밥 먹을까요? 밥해 줄까요? 뭐할까요? 우리 같이 뭐할까요? 뭐부터 시작할까요? 

   당신도 나한테 얘기해 줄래요? 당신 인생 그림은 얼마나 진행됐는지. 당신 미래의 어느 여백에, 나랑 같이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는지. 있다면 그 그림은 어떤 모습일지. 혹시 그 그림이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됐다면, 그 그림은 어떤 모습인지.    


   평생 살아온 이 점을 벗어나, 내가 처음으로 가는 곳에 당신이 있습니다. 내 그림의 시작이 당신입니다. 차근차근 이 새벽을 건너서, 금방 갈게요. 

   이 작은 틀 속에서만 살았던, 터무니없이 편협한 나를 사랑해 주어서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이따 봐요.





책 구매 안내 링크  :  www.parkdabin.modoo.at 


라이프 매거진은 삶의 조각들을 담아 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월은 명백히 우리 편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