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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Mar 30. 2017

첫사랑을 새롭게 떠올리며



   형과 형수님 모두 감기에 걸렸다. 형은 목감기, 형수님은 코감기. 어제, 토요일 아침, 골골대는 두 사람을 차에 태우고, 나는 병원에 갔다. 집 근처 대학병원 이비인후과에.

   형과 형수님이 진료 받는 동안, 나는 로비에 앉아 있었다. 번호표 들고 창구 앞을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러다, 문득, 첫사랑이 떠올랐다. 아니, 첫사랑과 관련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분무기에서 뿜어져 나온 물처럼 가늘게 내리는 빗속에서, 나는 뛰고 있다. 내 첫사랑인 그 여자에게 약봉지를 건네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약을 사다 준 날이었다. 누군가의 아픔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는 상태를 처음으로 경험한 순간이었다.





   비가 왔으니, 장마 기간이었나.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였는데. 아무튼, 그 무렵, 비가 제법 많이 내렸다. 옷을 얇게 입고 다녔는지, 그 여자는 감기에 걸려 버렸고, 그 감기는 점점 심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오후였다. 나는 그 여자로부터 문자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몸에 열이 많이 난다.’는 얘기가 메시지의 핵심이었다. 그 문자가 도착한 바로 그때, 나는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화학 시간이었다. 그 여자 문자를 받고 난 뒤로, 나는 무엇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이유로, 화가 났다.  

   그쯤에서 기억이 끊긴다. 그 다음 기억은 약국에서 시작된다. 초록색의 낡은 간판 달린 약국.





   나는 약사에게 감기약을 달라고 말했다. 약사가 내게 감기 증상이 어떠냐고 물어 왔다. 순식간에 벌게진 얼굴로, 나는 “제가 먹을 게 아니라서요. 잘 몰라요.” 하고 중얼거렸다. 입술을 양쪽으로 한 번 길게 늘이며, 약사가 돌아섰다. 

   약사로부터 받은 약봉지에 든 건, 종합감기약이었다. 약봉지를 쥐니, 네모난 상자 같은 게 만져졌다. 그걸 들고 약국 문 밖으로 나섰을 때, 허공에서 비 냄새가 났다. 

   나는 짧은 외출 중이었다. 자율학습을 위해,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잔뜩 꾀병을 부리고, 조퇴 허락을 받아도 됐으련만. 순진했던 나는, 그 여자 감기 증상을 고스란히 읊으며, 내가 이런 종류의 감기에 걸린 것 같으니 집에 가야 할 것 같다고, 담임선생님께 말했다. 

   내 말을 들은 담임선생님이 손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당연히, 내 이마에서는 열이 나지 않았다. 

   못 미더워 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던 담임선생님이, 내게 외출증 하나를 끊어 주었다. 병원 가서 주사 한 방 맞고 오면, 충분히 나을 거라고 하면서. 조퇴할 만큼 심각하게 아픈 건 아닌 듯하다고 하면서.

   학교로 복귀하기까지, 내게 주어진 시간은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였다.    





   오래된 약국을 나와 걸으며,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골목 끝에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뺨이 붉어진 그 여자를 만났을 때, 하늘은 어두웠다. 우물쭈물하는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 쓰며, 나는 그 여자에게 약봉지를 내밀었다. 내게서 약봉지를 받아 가는 그 여자의 손과 내 손이 살짝 닿았다. 나는 그 여자 손이 내 손보다 훨씬 따뜻하다고, 아니 좀 뜨겁다고 느꼈다. 

   우리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잠깐 얘기를 나누었다. 시답지 않은 얘기만 나눴던 건지, 대화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건, 그 벤치에 앉아 있던 내가 많이 웃었다는 것과, 그 사람이 나를 따라 많이 웃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서로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그 여자를 만나기 직전부터, 그 여자를 만나고 있는 순간 내내, 내 가슴속은 곧이라도 터져 버릴 듯 팽창돼 있었다. 그 느낌 때문에, 나는 틈틈이 불안했다. 그 느낌 때문에 불안한 게 아니라, 그 느낌 그 자체가 불안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뭐가 불안했던 건지는 모르겠다.  

   그 여자 눈빛을 해석해 낼 수가 없어, 머릿속이 어지럽기도 했다. 나는 내가 그 여자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으면 싶었다. 그 여자가 나로 인해 기뻐했으면 싶었다. 내가 있다는 이유로, 그 여자가 자신의 삶을 안전하게 느낄 수 있길 바랐다. 그 여자 옆에 앉아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나는 감히, 감히, 모든 행복을 소원했다.


   오히려 대담한 건 그 여자 쪽이었다. 그 여자는 얘기 도중에 내 손을 한두 번 잡았고, 내게 팔짱을 끼거나,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는데, 그 모든 동작이 대체로 자연스러웠다. 그 여자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그토록 스스럼없어서, 나는 그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와 결혼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벤치에서 일어났을 때, 나는 내 갈색 운동화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시간을 생각했다. 핸드폰을 꺼낸 내가 시간을 확인했을 때, 나는 ‘늦겠다.’고 생각했다. 담임선생님이 내게 할당해 준 시간을 넘겨서 학교에 도착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골똘히 시간을 확인하는 내게, 그 여자가 뭐라고 말했다. 이만 가 보라는 소리였던 것 같다. 

   거기서 또 기억이 끊긴다. 그 다음 기억은 비 내리는 밤거리다. 나는 그 속에서 달리고 있다. 걸어서는 30분 넘게 걸려야 갈 수 있는 거리를, 나는 10분 만에 주파했다.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나는 학교에 늦지 않았다. 전력으로 뛰느라 벌겋게 달아오른 내 얼굴을 쳐다보며, 담임선생님과 친구들이 많이 아프냐고 물어 왔다. 거짓말 같은 데 된통 서툴렀던 나는, 대답 없이 고개만 내저으며, 내 책상으로 돌아갔다.

   곧 야간 자율학습이 시작되었다. 내가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제야 생각났다. 뭐, 그런 건 아무 문제 되지 않았다.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았으니까. 배뿐만이 아니라, 내 몸의 모든 부위가 마비돼 있었다. 

   그 여자와 문자 메시지 주고받느라 바빠서, 나는 책 한 장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보고 왔는데 보기 전보다 더 보고 싶어지는 증상에 대해,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렇게 열렬하던 내 첫사랑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3개월? 4개월? 잘 모르겠다. 내가 고백해서 사귀게 되었고, 내가 헤어지자고 해서 끝나 버린, 약간 허무한 첫사랑이었다.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시작한 사랑이, 내 예상보다 빨리 몸집을 불려 버린 까닭이다. 내 삶보다 더 커진 그 사랑에 압도당해 버린, 열 몇 살의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도망뿐이었다. 

   사랑에 빠지고 난 뒤로는 사랑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랑이 아니면서 사랑과 관련된 수많은 것들이 내 삶을 쥐고 흔들었고, 그 흔들림은 갈수록 세졌다. 나는 그걸 도무지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내가 그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게 그런 위력이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사랑이 시작되면 그 사랑이 삶의 모든 곳으로 번져 간다는 걸, 사랑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삶의 공간 같은 건 없다는 걸, 알지 못했던 때의 일이다. 

   사랑과 삶을 분리된 개념으로 생각했기에, 커져 가는 사랑이 삶을 위협한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 여자와의 모든 걸 끝내고, 원래의 내 생활을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을 때, 바깥 날씨는 서늘해져 있었다. 가을이었다. 

   사랑이 열어 줄, 완전히 새로운 생활을 맞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내 시절 위로,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불었다.


   거기까지 회상했을 때, 형과 형수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형과 형수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와, 나는 그 여자를 계속 생각했다. 교복 입고 연애한 건 풋내기 애정이지, 사랑은 아니라고 말하며, 성인 된 후에 만난 여자를 내내 첫사랑으로 꼽았던 내가, 그 여자를 첫사랑이라 부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여자와의 짧았던 연애에서, 풋내 같은 게 전혀 맡아지지 않았다. 더는. 

   모든 게 처음이라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조금도 어설프지 않은, 불완전하지 않은, 오히려 터져 버릴 듯 가득 찬 사랑이었다. 그 여자와 나 사이를 채웠던 그 사랑은.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에 관한 기초적인 모든 걸, 그 여자에게 배웠다는 사실을. 기초적인 일부분이 아니라, 기초적인 모든 걸.

   그때, 그 여자도 나도 참 어렸는데. 사랑하는 법에 관해 상세히 가르쳐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서로를 감동시키고, 행복으로 물들이는 법에 대해, 우리는 어째서 그렇게 능숙했을까. 약간씩 버벅대긴 했지만, 우리는 그 방면에 능숙했다. 그 여자보다 좀 덜 능숙했던 내가 그 관계를 멋대로 박살내 버리기 전까지, 우리는 그 방면에 능숙했다.    


   완전한 사랑을 하지 못해서 헤어지는 게 아니라, 완전한 사랑을 균형 있게 지탱하는 방법에 덜 숙달되어서, 그래서 헤어지는 것이었다. 사람과 사람은.

   사랑은 언제나 온전한 것이었다. 살아갈수록 더 좋은 사랑을 만나게 되는 게 아니라, 살아갈수록 사랑을 운반하거나 보관하거나 키워 내는 내 능력이 차츰 나아지는 것뿐이었다.




사람과 삶을 공부합니다. 배운 것들을 책 속에 담아내며 살아갑니다. 모두의 마음과 삶이 한 뼘씩 더 환해지고 행복해지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느리고 서툴지만, 더 나은 책을 위해 부단히 고민합니다. 카쿠코 매거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매거진을 통해 소설집과 산문집을 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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