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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Apr 01. 2017

잘 자고 있지?



   안녕, 좋은 아침. 비가 내리네. 아직 초봄인데 말이야. 원래 초봄에도 비 소식이 이렇게 잦았던가? 아무튼, 비가 내려서 공기가 맑다. 바람에서 좋은 향기가 나. 개운한 것들을 보면 버릇처럼 네 생각이 나고.

   지금은 네가 자고 있을 시간 같은데. 꽤 이른 아침이거든. 네 방 창문 앞에 다가든 봄바람이 다시 공중으로 돌아갔으면, 싶다. 바람이 좀 차네. 향긋하긴 해도.    





   그렇게 아침잠 많던 내가 생활 패턴을 확 바꾼 것 때문에, 넌 적잖이 놀라고 있어. 어떻게 그런 변화가 순식간에 가능하냐고, 넌 이따금 의문스러워 해. 

   글쎄. 더 나은 삶을 갖고 싶다는 간절함이 내 습관의 벽을 간단히 무너뜨려 버린 것 같아. 더 나은 삶에 대해, 내가 제일 많이 말한 사람은 너고. 그 말은, 이 모든 변화의 원동력이 너라는 소리가 되는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넌 또 이렇게 대꾸하겠지.

   황송하다고. 그런 멋진 변화를 이끌어 낸 주역主役이 나라니, 정말 황송하다고.    


   찔리지? 근데, 황송해 하지 마. 황송惶悚하다는 말은, 받은 게 자기 분에 넘친다고 생각해서, 고맙지만 송구스러울 때 하는 말이잖아. 너도 정확히 그 뜻으로 그 말하는 것 같은데. 나한테 황송해 하지 마. 무슨 이유로든, 나한테 황송해 하지 마. 부탁이야. 나, 그 말 말고 다른 말 듣고 싶어. 다정한 침묵이나.

   오히려 황송한 쪽은 나라고도, 말 안 할래. 그냥 우리, 황송한 감사 말고, 그냥 감사하자. 서로한테. 응?    





   나한테 쏟아진 수많은 멋진 순간들이, 너로 인해 생겨났다고 말하는 거. 그거, 너한테 건네는 칭찬 아니야. 난 단지 하나의 담백한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나, 너한테 무지 고맙지만. 내 몸속에 흐르는 모든 물이 눈물처럼 글썽거리도록, 네가 나한테 고마운 존재이긴 하지만. 그 고마움으로, 내가 너한테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하는 건 아니야. 좀 더 오래 내 곁에 있어 달라고, 내가 너한테 애원하는 게 아니야. 우리가 오래 함께일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 바람을 너한테 강요하려고, 너한테 고마워하는 게 아니야. 고마움으로, 우리가 같이 보낼 시간을 구입하려는 게 아니야. 

   내 고마움은 그냥 고마움일 뿐이야. 너는 너고. 


   네 모든 선택, 널 한없이 자유롭게 만들어 줄, 네 마음을 가장 편안하게 만들어 줄 그런 선택이, 나한테는 제일 중요해.    

   내가 너한테 주는 모든 사랑 언저리에 자유가 있어. 그건 한 쌍이야. 

   사랑도 주고 자유도 준다는 게, 이렇게 자연스러운 일이 될 줄 몰랐는데. 사랑은 따뜻한 거지만, 자유는, 뭐랄까, 좀 차가운 거라고 생각했거든. ‘네 맘대로 해!’라는 뉘앙스 같은 게 느껴져서.

   근데 그게 아니네. 자유도 사랑만큼이나 따뜻하고, 사랑만큼이나 친밀한 거더라. 그것도 너로 인해 깨달았어. 미안해. 내 멋대로, 너한테 너무 많은 것들을 전해 받네, 나. 넌 그냥 내 곁에 있을 뿐인데, 그런 너한테 내가 얻는 건, 수백 가지 생애를 환생해 사는 것보다 더 큰 배움이야. 

   희한하지. 거룩, 하고.      





   어젯밤 꿈에 네가 나왔어. 너, 빨간 옷 입고 있더라. 빨간 옷이 그렇게 잘 어울리는 줄 처음 알았네. 

   꿈에서, 다른 사람들 맞이하느라, 우린 꽤 바빴어. 단둘이 남은 시간은 정말 짧았는데. 나는 그게 너무 아쉬워서, 너랑 단둘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너무 희박해서, 팔이 잔뜩 굳어지는 느낌을 받았어. 초조했나 봐. 나, 애탈 때마다 팔 부근에 뻣뻣한 느낌 받잖아.

   사람들 다 나간 방에, 너랑 나랑 잠깐 남아 있던 그 순간. 네가 나한테 잠시 안겨 있고, 그런 너한테 내가 뭔가 짤막하게 속닥대던 그 순간. 시간 조정 장치 같은 게 박살나 버린 건지, 갑자기 눈앞이 핑 돌더니, 시간 흐름이 느려지더라. 빠른 속도로, 느려지더라. 걸쭉한 액체처럼 아주 느리게 흘렀어, 시간이.

   그게 꿈인 줄도 모르고, 그게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시간인 줄도 모르고, 난 그 시간이 멈춰 버리길 바랐어. 그렇게 느려지다가, 영원히 멈춰 버리길 바랐어.    





   널 안았던 그 감각이, 지금도 쇄골 근처에 남아 있어. 그 감각이 흩어지지 않도록 몸을 조심조심 움직이면서, 아침을 보내고 있다.    


   사랑에 대해 어떤 정의를 내리면 좋을지, 자주 생각해. 널 사랑하게 된 이후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느낌이 정말 또렷해졌는데, 그거랑 별개로, 사랑 자체에 대한 궁금증은 자꾸 커지네. 사랑을, 한 치의 헷갈림도 없는 사랑을 하면서도, 이 사랑의 정체가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어.

   만약, 오늘 내가 10cm만큼인 사랑을 찬찬히 살피고 잠에 들었다고 치잖아?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에 봤더니, 사랑이 12cm가 돼 있는 거야. 그런 거야. 자꾸 불어나. 사랑이. 끝도 없이 퍼져 가. 사랑이.

   그러다 보니,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가 없어. 사랑을. 

   전체 구조가 매일 조금씩 바뀌면서 끊임없이 확장되는, 시뮬레이션 게임 속에 들어와 있는 거 같아. 지금 진행 중인 내 사랑이, 꼭 그런 게임 같아. 

   그래서 나는 참 진부한 혼잣말을 하게 되네. 여태 내가 한 사랑과 지금 이 사랑은 성질이 다른 건가, 하고. 물론 내가 거쳐 온 모든 사랑이 진짜였겠지만 말이야. 그것들하고는 차원, 이 다른 사랑이 내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같아. 

   이것도 진부한 말인가.    





   네가 잠들어 있는 방 창문이 얼마나 열려 있을지. 그 방 창틀에 봄비가 얼마나 고여 있을지. 네 꿈결에 봄이 얼마나 밀려들어 있을지. 그런 것들을 가만히 생각하면서, 아침을 보내고 있다.

   봄이 오는 소리보다, 네 마음이 세상을 걸어 다니는 소리에 더 귀 기울이게 되는, 그런 날들. 꽃보다 먼저 피어난 내 마음에서 떨어져 나온, 꽃잎 같은 환한 기분들이 온 허공에 흩날리는, 그런 날들. 

   너한테 해 주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하루가 자꾸 짧게만 느껴지는, 그런 날들.

   나는 요즘 그런 날들을 보내고 있다. 덕분에.




사람과 삶을 공부합니다. 배운 것들을 책 속에 담아내며 살아갑니다. 모두의 마음과 삶이 한 뼘씩 더 환해지고 행복해지는 책을 만들고자 합니다. 느리고 서툴지만, 더 나은 책을 위해 부단히 생각합니다. 카쿠코 매거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매거진을 통해 소설집과 산문집을 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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