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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Apr 27. 2017

곤두박질 후에야



   모든 걸 잃어버린 날,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든 게 앗아져 버린 날,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숨이 흩어지고 나서야 울음이 그쳐질 것 같은 날,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제야 그게 가능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와 그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건, 피할 수 없는 현실 문제 따위가 아니었음을. 그런 문제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음을. 그 사람과 나를 악착같이 떨어뜨려 놓았던 건, 한낱 내 자존심이었음을. 그뿐이었음을.

   더 이상 자존심을 챙겨 모을 수 없게 되고 나자마자, 나는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를 마저 말하기도 전에, 그 사람이 당황해 쩔쩔 매도록, 나는 다 갈라진 목소리로 통곡했다.

   제발 여기로 좀 와 달라고 했다. 지금 너만 필요하다고, 너 없으면 죽을 것 같다고 했다. 

   바보 같은 그 사람은, 그런 내게 울면서 왔다. 뭐 예쁘다고, 뭐 예쁘다고, 나를 꼭 안고, 나와 같이 울었다.  





   그 날 나를 으깨 버린 비극에게 고맙다고는 못하겠다. 그런데 그 비극이 나를 알몸 같은 처지로 만든 순간, 절대 못할 것 같던 것들이 순식간에 가능해졌다. 

   한심하거나 하찮을 것까지는 없지만, 내가 특별히 대단한 사람인 것도 아니라는, 자기 가치의 제로 포인트. 자기 가치가 없다는 게 아니라, 자기 가치에 대한 불필요한 과장도, 생략도 없다는 의미의 제로 포인트에 도달한 순간, 자존심도 허영심도 뭣도 없이 딱 나만 남은 순간, 허세 때문에 밀려나 있던 진짜 가치가 눈앞에 와르르 쏟아졌다. 

   가짜 가치 때문에 가려져 있던, 진짜 가치가.    





   어떤 사람인 척하느라, 나는 어떤 사람을 오래 밀쳐 두고 살아 왔다. 나 아닌 어떤 사람도 되지 않을 만큼 용감하지는 못했기에, 나 아닌 어떤 사람도 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나서야, 그 사람을 부를 수 있었다. 아무 계산 없이.


   나 아닌 어떤 사람 모습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참 많지만, 오직 나인 모습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면서, 나는 내 오열에 덩달아 우는 그 사람 품에 오래 안겨 있었다.

   뭐 잘했다고, 뭐 잘했다고.    


   그런 극적인 화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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