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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Aug 20. 2019

내가 사랑한 사람, 나를 사랑한 사람

 

「관계의 끝이 보일 때는 언제예요? 아, 너무 늦은 시간인가. 자요?」


「미안해요. 자고 있었어요. 어제 평상시보다 더 많이 움직였더니, 해 지자마자 노곤해져서. 답장 기다렸어요? 일어났어요?」


「네. 일어났어요, 조금 전에. 답장, 기다렸죠. 당연히. 한 30분 정도 기다렸나. 당신 잘 거 같긴 했는데, 혹시나. 한 번씩 늦게까지 안 자고 버티길래, 혹시나. 근데 답장 기대 안 하고 문자 보내는 사람이 있어요? 아니, 있기야 하겠는데……. 문자도 편지도 기본적으로 상대에게 말을 거는 일이니까, 어떤 반응을 기대하게 되지 않나. 갑자기 뜬금없는 얘기지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렇죠. 반응에 대한 기대감이 아예 없기는 어렵지 않나. 무반응에 지쳐 나가떨어지기 전까지는, 그 기대감이 남아 있겠죠. 그게 남아 있으니까 누구한테 계속 말을 걸 수 있는 거고. 난 그렇게 생각해요. 사람마다 체력 다 다르듯이, 상대방 무반응 속에서 버틸 수 있는 지구력도 전부 다르겠고. 아직도 궁금해요? 나는 언제 관계의 끝을 보는지. 대답할까요?」







「안 바쁜가? 아침인데. 그냥 오후에 시간 되면 대답해 줘요. 이게 재미있거나 따뜻한 주제가 아니니까, 아침부터 당신 그런 쪽으로 머리 쓰게 하기 그런데.」


「밤에는 괜찮구요? 난 낮에도 괜찮은데. 재미없고 차가운 부분들도 내 인생인 걸, 뭐.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편하더라구요. 인생 뒤쪽 그늘에 있는 것들, 이제는 불편하지 않아요. 어느 순간에서도. 개운하게 자고 난 아침에도. 10분만 있다가 다시 문자할게요.」


「진짜로, 급하게 대답 안 해도 되는데?」


「이거, 오래 생각해 볼 문제 아니라서요. 나한테는 좀 간단한 문제라서. 급하게 대답하는 거 아니에요. 당신 내 대답 다 듣고 나면, 내 대답 시시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진부하다거나. 그 관계가 더 이상 관계일 수 없을 때, 그걸 깨달을 때, 나는 그 관계의 끝을 봐요. 두 사람의 관계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을 때. 관계라는 것이 사라지고 두 사람만 덜렁 남아 있을 때.」


「그게 뭐지?」


「거기에 두 사람이 여전히 있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함께 움직이지 않을 때. 두 사람이 서로 관련을 맺는 게 관계잖아요. 근데 어느 한쪽이 그걸 관둔 거죠. 그래서 나머지 한쪽만 움직여요. 한쪽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나머지 한쪽만 움직여요. 멀리서 얼핏 보면 서로가 왔다갔다하는 거 같은데, 자세히 보면 한 사람만 왔다갔다해요. 그럴 때, 나는 관계의 끝을 봐요. 그 관계의 수명이 다했다고 생각해요. 어느 순간부터 그 관계가 일방향적 관계가 되었다는 부분을 인지할 때. 한쪽만 다른 한쪽을 만나러 갈 때. 한쪽만 다른 한쪽을 인내할 때. 한쪽만 다른 한쪽을 사랑할 때. 혼자 애쓰는 그 한쪽의 사람이 끝을 내지 않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벌써부터 끝이 났는데, 그 관계. 절차적인 끝을 내지 않고 있는 거예요, 혼자 아등바등하고 있는 그 사람이. 짝사랑을 시작한 거예요. 짝사랑도 사랑이어서 어쨌든 그 사랑은 온전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관계를 끝까지 이어 나갈 수가 없으니까. 두 사람의 교류 형태가 바뀌면서 관계의 종말 지점이 생기는 거죠. 나한테는 그래요. 사랑하고 관계는 별개.」







「간단하면서도 간단하지가 않네. 와 닿아요. 당신이 한 얘기 전부. 당연한데도 마음 시큰하게 만드는 사실이라. 한쪽이 이미 오래 전에 끝낸 관계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내려놓는 나머지 한쪽이 있죠. 당신은 주로 어느 쪽에 있었어요?」


「난 좀 이중적인 태도로 이별하는 쪽이었어요. 누가 나와의 관계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리면, 나도 그 즉시 그 사람에게서 물러나요. 마음은 거기 그대로 있는데, 몸은 민첩하게 움직여요. 내가 그렇게 한 제일 큰 이유는, 아직 사랑하는 그 사람을 괴롭히고 싶지 않아서. 그 다음 이유는, 그 사람한테 매달리느라 나를 괴롭히고 싶지 않아서. 이미 마음 뜬 사람 붙잡고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어요. 내 간절함이 상대한테는 구차함으로만 보일 확률이 크고. 마음이 뜨면 다 그렇게 보이니까. 이별의 과정이 길어지고 복잡해질수록, 서로의 눈에 서로가 자꾸 못나 보이게 되더라구요. 상대는 내가 지겨워서. 나는 상대가 야속해서. 아름답진 못하다 해도, 누추한 이별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상대가 나를 떠나고 싶어 하면, 나도 상대를 얼른 떠났어요. 그게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마음은 그 자리에 오래 남죠. 두 사람 발자국이 마지막으로 나란히 찍혀 있는 그 자리에, 내 마음이 오래 남죠. 발바닥에서 힘 못 풀고 식은땀 뻘뻘 흘리고 있는 내 마음. 나 혼자만 봐야 되는 거잖아요, 그거. 그 마음 빌미로 누군가를 붙잡아 놓고 있는 건, 사랑이 아닐 테니까.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나를 사랑해 주는 건 행운이에요. 행운이 끝나는 건 배신이 아니고. 그게 배신이 아니니까, 나는 나를 떠나는 사람한테 아무것도 요구해선 안 돼요. 내 마음이 다할 때까지 내 곁에 있어 달라고 애원해선 안 돼요. 나에게로 올 때는 그 사람을 좋아하고, 나로부터 떠나갈 때는 그 사람을 미워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한 게 아니라, 그냥 사랑 받는 경험을 사랑한 거겠죠. 나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요. 그래서 내가 사랑한 그 사람보다 나를 사랑한 그 사람이 더 소중해지지 않게, 내 마음을 잘 간수하려고 해요.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 때도 나는 그 사람을 사랑했던 시절이 있어요. 그 시절의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나는 내 마음의 뺨을 자주 두드렸어요. 누구한테 뭘 받는 게 당연해지면, 나한테 더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그 사람에게 좋지 않은 마음을 내게 돼요. 내가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그 사람이 떠나가는 게 힘든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는 그 사람이 나한테 주는 것들이 당연해져서. 그 사람이 나한테서 마음을 거두는 게 비정상적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그래서 힘든 거더라구요, 나는. 나는.」







「찔린다, 뭔가.」


「그러라고 한 소린 아닌데. 그냥 이실직고한 거예요. 하고 나니, 참회가 되네. 이별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한 모든 순간, 나는 누군가가 내 곁에 머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요즘은 그런 생각이 자주 들어요. 그 사람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롭게 해 주는 게, 그 사람에 대한 최고의 사랑이다. 내 옆에 매어두지 않고 그 사람을 그저 바라보고, 거기서 근본적인 행복을 느끼는 거.」


「돼요?」


「되게 해야죠. 마음을 자꾸 관리해야죠. 오래 지속되는 만족을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게. 내가 잠든 밤에 당신이 나를 생각하고 궁금해하는 그런 것도 절대 당연한 게 아니에요. 당연한 게 많아지면 마음에 녹이 슬어요. 녹이 번지다 못해 내 마음 전부를 뒤덮으면, 나도 내 마음의 원래 색깔을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내 마음이 원래 이런가 보다.’ 생각할 수가 있어요. 사실 거기까지 가면, 답 없죠. 그래서 자꾸 닦아요, 내 마음을. 닦을 때마다 손바닥에 녹이 묻어 있어요. 평생 해야 하는 일인 거 같아요, 마음 닦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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