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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도인 박대리 Oct 22. 2023

누르고, 조르고, 꺾고

무릎걸음으로 싸우는 “굳히기”의 재미


‘암바’라는 기술을 아시는지. 레슬링과 종합격투기에서 자주 등장하는 기술이며 꽤나 대중적으로 알려져서 코미디나 만화에서도 종종 장난스레 묘사되곤 한다. 암바는 상대의 팔을 잡고 누워 관절을 꺾는 기술로, 이 기술에 걸린 이는 팔꿈치가 반대로 꺾이는 큰 고통을 느끼고 탭을 치며 항복 선언을 하게 된다. 이를 악물고 버틸 수야 있겠지만 되도록 추천하지 않는다. 그렇게 버티다가는 팔이 부러지고 말 테니까. 암바는 유도에서는 ‘팔가로누워 꺾기’에 해당하는 기술이다. 그렇다. 유도에도 그라운드 기술이 있다. ‘굳히기’다.


'암바 여제' 론다 로우지. 미국 전 유도 국가대표 선수 출신의 파이터였다. 그녀의 특기 기술 중 하나가 바로 '암바'였다.(사진출처-UFC.com 동영상 캡처)


도장에서는 굳히기 기술을 연습하기 위해 무릎걸음으로 움직이며 상대와 겨루는 굳히기 대련을 하곤 한다.(간혹 굳히기 수업은 거의 하지 않고 메치기만 집중적으로 하는 도장도 있긴 하다.) 즉 일반적인 유도 대련이 서서 하는 대련이라면 굳히기 대련은 무릎을 꿇고 상대를 맞잡는 좌식 대련(?)이라고 볼 수 있다. 상대를 밀고 당기며 무게중심을 뺏어 쓰러뜨린 뒤 상대의 등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누르거나, 목을 졸라 탭을 받아내거나, 관절을 꺾어 탭을 받아낸다. 누르기의 경우 상대를 누른 상태로 20초를 버티면 한판, 10초 이상을 버티면 절반 선언을 받는다.

예전에는 굳히기를 싫어했다. 왜 해야하는지도 몰랐으니까. ‘유도’라고 하면 서서 업어치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시원하게 한판승을 만들어내는 스포츠가 아닌가?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또한 유도의 움직임이 몸에 배어있기 전이라 무릎은 바닥에 못박아둔 채 팔로만 상대를 밀고 당기기만 하니, 금방 지치고 곧잘 무게중심을 뺏기고 바닥에 내리눌리기만 했다. 누르기에 눌려서 상대에게서 빠져나오려 이리저리 버둥거리다보면 온몸이 땀범벅이 됐다. 알고 있는 굳히기 기술이 적었고 들어가는 타이밍과 요령이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냥 굳히기 상황에 들어가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라는, 즉 무조건 한판으로 상대를 메치면 되는 거 아니냐는 다소 안일하고 오만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깔끔한 한판을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다. 상대를 메쳤을 때 심판이 한판 선언을 하면 시합은 거기에서 끝난다. 하지만 만약 심판의 손이 수평선을 그리며 ‘절반’을 선언하면 시합은 그치지 않고 이어진다. 절반은 말 그대로 반쪽짜리 한판이므로, 두 번을 받아내야 시합을 끝낼 수 있다. 게다가 ‘절반’의 주의점은 그 순간에 심판이 ‘그쳐’를 말하지 않은 상황이므로 계속 서로에게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판’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시합을 포기하듯 힘을 뺐다가, ‘절반’ 선언이 나와서 경기가 계속 이어지면 방심하는 사이에 상대에게 마저 절반을 뺏기기도 한다. 역전의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판처럼 넘어갔더라도 메치기를 당한 사람은 빠르게 엎드려 방어 자세를 취해야 하고, 공격을 걸었던 사람도 혹시나 모를 절반 선언에 대비해 땅에 떨어진 상대에게 바로 굳히기 기술을 들어가야 한다.


굳히기를 그닥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시합에서 굳히기는 효자 기술이었다. 상대가 낮은 업어치기를 들어왔다가 무게중심을 잃고 앞으로 무릎을 꿇고 넘어졌을 때, 또는 발목 받치기나 업어치기를 걸었는데 상대가 애매하게 절반으로 떨어졌을 때, 바닥에 구르고 있는 상대에게 바로 곁누르기를 들어가서 한판을 만들었다. 또는 업어치기에 실패한 상대가 엎드린 방어자세를 취했을 때 엄지손가락을 상대의 목깃 안쪽으로 밀어넣어 깃을 말아쥐고 팽이 조르기를 건 적도 있었다. 그때는 이미 상대와 한차례 몸싸움을 하면서 과도하게 흥분한 상태여서 나도 상대도 주변의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상대가 탭을 치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 힘껏 조르면서 상대를 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거기까지! 그쳐!” 

심판이 다가와서 등을 두드리고 나서야 정신이 들어 몸에서 힘을 뺐다. 눈을 떠서 아래를 보니 상대의 눈이 하얗게 뒤집혀 있었다. 목이 졸려 기절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어렸고 누군가의 목을 졸라 기절시킨 게 처음이라 큰 충격을 받았다. 시합을 끝내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동안, 그리고 이후로도 한동안 자꾸만 상대의 죽은 듯한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다행히 상대는 곧 의식이 돌아왔다. 팽이 조르기는 요즘도 도장에서 즐겨 쓰고 있다. 지금은 당연히 상대가 탭을 치면 바로 놔준다. 

팽이 조르기를 즐겨 쓰는 이유는 업어치기를 시도했다가 주저앉은 상대의 옆으로 돌아 조르기를 시도하기가 수월하고, 무엇보다 잘 틀어잡기만 하면 나보다 덩치가 큰 사람에게서도 탭을 받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곁누르기를 제일 자주 쓰고 몸에 익은 기술이지만 80kg가 넘는, 특히 가슴과 팔이 두툼한 사람들에게 쓰면 누르기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상대가 나를 반대편으로 넘겨버린다. 조르기와 꺾기는 포인트만 잘 잡아 압박하거나 꺾어주면 덩치가 큰 사람에게서도 탭을 받아낼 수 있다.(물론 팔의 힘이 무지막지하게 강한 사람에게 암바를 시도할 때 순간적으로 잡아채지 않으면 팔꿈치를 펴게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렇듯 도장에서 연습을 하는 상황에서는 입식 대련이든 굳히기 대련이든 남녀가 섞여서 곧잘 하고 있긴 하지만 굳히기에서는 이성 간의 연습이나 대련이 다소 조심스럽다. 굳히기 대련이 바닥에서 뒤엉켜 누르고, 조르고, 꺾는 기술이 주를 이루다보니 불가피하게 밀접한 신체 접촉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굳히기 연습 상황에서 짝을 이루는데 남자분과 흰띠 여자분을 붙여놓고 무심코 남자분에게 ‘가로누르기’를 연습해보라고 시켰다. 가로누르기는 누워서 기술을 받아주는 상대의 겨드랑이 옆으로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상대의 두 다리 사이로 팔을 깊게 감아 넣어 바닥에서 상대의 띠를 잡는 동작이 있다. 다소 민망할 수 있는 동작이라 아직 굳히기 경험이 별로 없는 흰띠 여자분에게는 다소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수업이 끝난 뒤에 관장님께 불려가 그 상황에 대해 주의를 받고 내가 세심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이성과 굳히기를 맞잡는 상황에 익숙했던 탓에, 그와 같은 동작이 생경할 수 있는 흰띠분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는 내가 ‘잡기’ 당사자가 되어 남자분과 기술 연습을 할 때에도 기술 이름을 말하고 양해를 구하고 굳히기에 들어간다. 그리고 굳히기 짝을 이룰 때 이성끼리 잡게 되는 경우에는 당사자들에게 괜찮은지 양해를 구한다. 

유도는 여러 사람이 모여 짝을 지어 하는 운동이다보니 매순간 눈앞에 서는 상대가 휙, 휙 바뀐다. 그렇기에 당장 눈 앞에 서 있는 이와 맞잡고 어떤 동작을 할 때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 노력한다. 만약 나의 어떤 동작으로 인해 누군가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을 최소화하고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가 계속 매트 위에서 함께 유도를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요즘은 굳히기에 제법 재미를 붙이고 있다. 주말마다 입식 자유대련뿐만 아니라 굳히기 대련도 자주 하게 되면서 좀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달까. 유튜브라거나 릴스, 쇼츠 등의 숏폼에 주짓수나 유도 기술 영상이 워낙 방대하게 올라와있다보니 틈날 때마다 들여다보곤 한다. 그러나 영상 속의 복잡한 기술들은 당최 어떻게 꼬아서 들어가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다들 구렁이처럼 상대의 몸을 칭칭 감아 안는데, 몇 차례를 돌려보고 도장에 가서 막상 시도해보려 하면 손과 발이 갈 길을 잃고 멈춰버리고 만다. 눈으로 보고 이해한 것과 직접 몸으로 해보는 건 역시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렇게 상대를 이리저리 비틀어도 보고 감아보기도 하고 있노라면 무릎을 꿇고 빈틈을 내주지 않으려 똘똘 뭉쳐있는 상대가 마치 풀어야 할 정육면체의 큐브 장난감처럼 느껴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큐브가 되어주는 굳히기 대련에는 입식 대련과는 또다른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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