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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도인 박대리 Sep 26. 2023

한 번만, 딱 한 번만 이겨보자

간절했던 첫 "한판승"이 만들어낸 것


무참히 기절하면서 허무하게 끝나버렸던 2012년의 첫 번째 시합 이후 3년이 흘러서야 나는 두 번째 시합을 치렀다. 으레 변화무쌍하기 마련인 이십대 초중반. 스물두 살에서 스물다섯 살이 되도록 나의 주변 환경은 크고 작은 굴곡을 거치며 변화해 있었다. 마땅히 꿈이랄 게 없었기에 더없이 뜨뜻미지근한 방황을 거쳐 직장인이 됐다. 이력서의 토익 점수란은 비어있는데 자격증 목록에 ‘유도 2단’이라고 적혀 있으니 궁금해서라도 면접 자리에 부르는 회사들이 많았다. 온라인 콘텐츠에디터 면접 자리에서 회사의 첫 인상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해 ‘이 파티션 가득한 사무실, 마치 드라마 <미생> 같아요.’라는 한마디에 부사장님이 폭소를 터뜨렸고 짐작컨대 그 답변 때문에 합격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갑자기 회사원이 되었다. 

학교 졸업 학기부터 취업이 되기 전까지는 잠시 유도를 쉬었더랬다. 마침 청림유도관에서 유도 2단을 땄고 나는 잠시 취업을 준비하며 숨을 고르고 있었던 것이다. 취직이 되고 난 뒤 나는 회사 인근의 유도장을 탐색했다. 그러다가 체육관보다도 먼저, 소속이 없이도 참가할 수 있다는 “제5회 네이버 카페컵 전국유도대회” 소식을 접하게 됐다. 3년 전의 첫 번째 시합에서의 굴욕이 떠올랐지만 이제 그때의 내가 아니라는 자신이 있었다. 잠시 유도를 쉬고 있었지만 이제는 검은띠를 맨 2단이었고, 어디 다른 도장을 가서 웬만한 사람들을 잡아봐도 힘이나 기술 면에서 제법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나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홀로 몰래 시합을 신청했다.



시합은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개최됐다. 처음 가보는 곳이었고 집과는 멀리 떨어진, 작은 경기장이었다. 그날은 날이 흐렸다.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시합 참가 소식을 D에게는 고백했다. 유도를 쉬는 동안 잠시 다녔던 복싱 체육관의 코치였던 D의 전공은 유도였다. 그는 차로 나를 경기장까지 데려다주고 소속이 없었던 나의 코치 역할도 도맡아줬다. 시합 경험이 단 한 차례뿐이었던 데다가 3년 전이었으니, 호기롭게 신청을 해놓고도 나는 극도의 긴장 상태였다. 시합장에 도착해 대진표를 확인해보니 첫 번째 상대의 이름이 ‘타샤’였다. ‘닉네임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도복을 갈아입으러 화장실에 갔다. 흑인 여성 두 명이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을 보며 도자기 같이 매끈한 어깨에 테이핑을 하고 있었다. 벗어서 드러난 상체가, 근육을 잘 모르는 내 눈에도 굉장히 발달돼보였다. 둘 중 하나는 분명 ‘타샤’였다. 화장실을 나오는 내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날의 경기는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제대로 된 기술을 한 번도 들어가보지 못하고 타샤의 기술을 버티기에만 급급했다. 잡기 싸움에서부터 밀려서 계속 뒷깃을 내어주고 익숙하지 않은 왼쪽 기술을 걸려고만 했다. 타샤의 업어치기가 들어오면 한판을 가까스로 피해 엎드린 뒤, 방어 자세에 들어간 타샤에게 어설픈 조르기만 반복했다. 2분 동안 타샤와 그 레퍼토리를 거듭했고 중간에 내가 절반을 내어줬던 건지 최종 판정은 타샤의 승리로 끝났다. 숨이 너무 차서 헐떡이며 경기장을 나오는데 나오자마자 D가 등을 두드려줬다. ‘기술을 들어갔어야지’라는 식의 아쉬운 소리 없이 그저 싸움을 끝낸 것에 대해서 고생했다고, 잘했다고 내 어깨를 감싸줬다.

한 판도 이기지 못했지만 참가자 수가 적어서 나는 동메달을 받게 됐다. 거저 받는 동메달임에도 나는 시상식을 할 때까지, 즉 모든 경기가 끝날 때까지 두 시간 정도를 기다렸다. 이기지 못하고 받는 상일지라도 내 인생 최초의 메달이 너무나 갖고 싶었다. 시상식 차례가 되었을 때 인파를 헤치고 타샤를 찾으러 돌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외국인인 타샤는 시상식 방송을 못 들었는지 일행들과 모여 있다가 내가 ‘타샤!’ 하고 부르는 소리에 나를 돌아봤다. 나는 타샤의 손을 잡고 시상대로 달려갔다. 타샤가 금메달이었는지 은메달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이후로 타샤를 다시 조우한 적은 없다. 타샤도 이 지구 어딘가에서 유도를 계속 하고 있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구름이 가득 낀 채로 해가 저물어서 일찌감치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가방에는 동메달과, 땀과 먼지에 절은 청도복이 담겨 있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창밖을 보다가 나는 D의 옆자리 조수석에서 도롱도롱 잠이 들었다. 단 2분의 경기를 치렀을 뿐인데 온몸이 노곤하고 눈꺼풀이 무거웠다. 며칠째 시합 걱정으로 힘이 바싹 들어가있었던 몸과 마음에서 긴장이 풀렸던 탓이리라. 꿈도 꾸지 않고 깊게 잠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D가 나를 깨우고 있었다. ‘모래내설농탕’ 가게 앞이었다. 우리는 들어가서 설렁탕 두 그릇을 시켰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또 지고 말았다는 아쉬운 마음, ‘나는 정말로 안되는 걸까, 그 한 판 이기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걸까’라는 좌절감이 차올랐다. 그런 휑뎅그레한 마음에 뜨거운 설렁탕 국물을 들이키니 헛헛했던 속이 뜨끈하게 차올랐다. 비가 와서 그런지 국물이 더 진하고 묵직하게 느껴졌다. 따끈해진 포만감에 한결 기분도 마음도 괜찮아졌다.



종로 YMCA에서 보낸 시간


그때는 시합에서 딱 한 번만 이겨보고 싶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번만. 그게 너무 어렵고 까마득한 일 같았다. 일단은 걱정하던 시합을 끝내고나니 결과야 어찌되었든 마음은 편해졌고 다시 신입사원의 일상에 집중하게 됐다. 입사했을 당시에는 회사가 인사동에 있어서 인근의 종로 YMCA 유도관의 아침반을 다니기 시작했다. 아침의 유도 수업은 꽤 운치가 있었다. 깜깜한 새벽의 버스를 타면 조조할인이 되어 저렴하게 종로까지 갈 수 있었다. 도복을 입고 나무 바닥에 앉아, 창 밖으로는 새벽 여명이 밝아오는 걸 바라보며 몸을 풀었다. 밤새 자는 동안 굳어 있던 몸으로 바로 구르기를 하니 뒷목이 뻐근하기도 했지만 땀을 흘리며 개운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유도를 오래하신 어르신 분들이 많았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저녁반 수업의 언니들 두 명이 나를 구경하러 아침반 수업에 놀러왔다. 힘이 센 검은띠 여자애가 아침반에 새로 왔다기에 궁금해서 보러 왔다고. 시합장에서 타샤에게 기술 한 번 제대로 못 들어가놓고도, 여전히 나는 ‘여자라면 어찌저찌 이길 수 있다’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그들과 맞잡았던 것 같다. H언니는 유도를 오래 해온 중량급의 삼십대 여성이었다. 나보다 키가 조금 큰 정도라고만 생각하고 목깃을 잡았는데 마치 바위를 미는 것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아침부터 나는 그녀의 손에 이리저리 저글링을 당하고 메쳐졌다. 무게중심과 힘이 정말 좋았다. 나보다 체중이 많이 나가는 걸 떠나서 몸에 유도가 배어있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해도 이 사람과의 실력 차이를 뛰어넘을 수가 없겠다는 압도감이 들었다.

나는 그날 이후 그들을 따라 저녁반으로 옮겼다. 어차피 곧 회사가 강남으로 이사가게 될 예정이어서 아침반 수업은 몇 개월 뒤부터는 다니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 저녁반은 아침반보다 준비운동 시간도 길고 무엇보다 매일 자유대련을 했다. 체육관이 넓고 사람도 많아서 익히기를 한 바퀴 도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학생이나 어린 아이들도 있었지만, 종로 일대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유도인들이 퇴근을 하고 오기 좋은 시간대여서 대부분이 30대 이상이었다. 즉, 유도를 오래 즐겨온 사람들이 많았고 나이, 국적, 성별 또한 골고루 뒤섞여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과 매일 대련을 해볼 수 있어서, 특히 여러 여성 유도가들과 대련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전까지는 유도를 하는 여자가 많지 않아서 남자들하고만 대련을 해왔는데, 사실 남자는 상대가 여자일 경우 힘을 많이 빼고 받아준다. 그렇다보니 내 입장에서는 상대가 진정 힘을 썼을 때의 기세를 경험해보기가 어려웠다. 또한 나보다 힘이 센 남자들과 밀고 당기기를 하다보면 모든 동작, 매순간 힘이 많이 들어가게 돼서 습관처럼 경직되어 있거나 뻣뻣하게 움직이곤 했다. 


그랬기에 YMCA에서 보낸 시간은, 나와 비슷하면서도 각자 다른 개성을 가진 여성 유도가들과 잡아볼 수 있는 귀한 경험이 되었다. H언니가 나보다 체급이 높고 수련 기간이 길어 이기기 어려웠다면, S언니는 가뿐한 몸놀림에 기술과 운동 감각이 뛰어났다. 심지어 청림에서 내가 흰띠를 매고 운동을 시작했을 때, 당시 그곳에서 처음 만났던 S언니는 노란띠를 매고 있었다. 즉, 수련 기간도 나와 비슷한 데다가 50kg도 채 되지 않았던 S언니는 업어치기와 발목받치기로 당시 60kg을 넘나들던 나를 가볍게 휙휙 넘기곤 했다. 그야말로 ‘유능제강’의 표본이었달까. 언니들 뿐만 아니라 매일 퇴근 후 저녁 시간을 함께 YMCA 체육관에서 보냈던 이들은 나에게 있어서 함께 땀흘리는 동료이자, 스승이자, 라이벌이었다. YMCA 소속으로 그해 2월 말에는 보성고에서 열린 ‘제13회 서울특별시삼일절기념유도대회’, 4월 말에는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제32회 서울특별시유도회장배유도대회’에 참가했다.


네이버컵 유도대회에 응원을 와줬던 D는 나의 유도에 대해서 내내 큰 기대가 없었다. 나의 세 번째 시합이었던 삼일절기념유도대회에서 내가 돌연 허리껴치기로 한판승을 했을 때, D가 찍어준 동영상에는 D가 당황해서 내는 신음소리가 담겨있었다. 기쁨의 환호가 나오기보다 갑작스러운 한판에 할 말을 잃었다고. 나 역시도 무심코 상대를 허리껴치기로 메친 뒤 벙쪄서 가만히 서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역시도 여성 참가자수가 적어서 딱 한 판을 이겼을 뿐인데 금메달을 받았다. 한 판이면 어떠랴. 그 한 판이, 금메달이 너무나 간절했는데. 그 첫 금메달이 촉진제가 된듯, 그 다음 경기였던 4월 말의 서울특별시유도회장배유도대회에서도 금메달을 받았다. 그때는 참가자가 제법 있어서 두, 세 판 정도의 경기를 치르고 우승했다. 게다가 언니들과 같이 단체전에도 출전하게 되어 다같이 금메달을 받았다. 


개인전. 업어치기로 절반을 따고 누르기로 마저 절반을 따냈다.(제32회 서울특별시유도회장배유도대회. 2016년 4월 30일)
단체전 시작 직전.(제32회 서울특별시유도회장배유도대회. 2016년 4월 30일) 이때는 청도복, 백도복 모두 챙겨가야 했다.


아주 작고 사소한 무언가일지라도 승리의 경험은 중요하다. 언니들과 함께 땄던 2016년의 금메달들은, 운동뿐만 아니라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나에게 어떤 힘을 불어넣어줬다. 이후 인생에 크고 작은 변곡점이 찾아올 때마다 그곳에 있는 가까운 유도관을 찾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미지의 타인과 맞잡는 것, 나아가 회사든 프로젝트든 함께 일을 하거나 소통하는 것에 대해 두려우면서도 설렘을 느끼게 됐다. 개인적인 상황과 2019년 말에 창궐한 코로나19 등 다양한 요인으로 다시 유도 시합에 참가하기 시작한 건 몇 년 뒤의 일이 되었지만, 나는 체육관과 사회 안에서 나만의 크고 작은 대련을 계속 이어갔다.

회사에서도 업무적으로 깨지고 퇴근 이후 도장에 가서도 마음처럼 대련이 안 풀리는, 그야말로 패배의 연속인 날도 있다. ‘나란 놈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구나.’ 싶어서 우울하기도 하지만 땀과 근육통에 절어버린 몸을 뜨거운 물로 씻어내고 나면 또 한결 괜찮아지는 것이다. 한껏 온몸으로 부딪히고 잔뜩 쏟아낸 뒤에 찾아오는 개운함, 그 카타르시스는 나를 계속 매트 위에 서게 한다. 

깎여나가고 소진됐다면 다시 뜨거운 무언가로 채우면 된다. 비 내리던 날 들이켰던 설렁탕 국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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