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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도인 박대리 Sep 17. 2023

아무리 못해도 1분은 버틸 줄 알았지

"첫 시합"이란 건 으레 그런 거잖아요.


유도 대련을 처음으로 했던 건 유도를 배우기 시작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고작해야 낙법만 배운 시점이었다. 당시 다니고 있던 청림유도관은 목요일에는 굳히기 대련, 금요일에는 자유대련을 했다. 입관했던 첫주 금요일, 사람들 여럿이 마주서서 자유대련을 하는 동안 관장님께서 내게도 구석 한 자리를 내주셨다. 초등학생 치고 키가 제법 큰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아는 기술이 없어서 머리를 긁적이고 있으니 관장님께서는 ‘어떻게든 이리저리 흔들고 기울여서 상대를 넘어뜨려보라’고 하셨다. 말수가 없는 조용한 남자 아이였는데 공격은 하지 않고 방어만 하며 내 어설픈 공격을 부드럽게 받아줬다. 밭다리후리기조차 배우지 않은 상태였기에 나는 무작정 남자아이를 고꾸라트리려고 끙끙 이리저리 힘을 주며 땀을 흘렸다. 몸을 쓸 줄 모를 때였으니 오로지 팔 힘만으로 흔들어댔을 뿐이다. 1분 남짓이나 했을까, 허무하게 대련이 끝났다. 남자아이를 넘어뜨리지 못했다. 남자아이는 그 자리에 서서 태연히 다음 상대를 기다리고 나는 헉, 헉 숨을 몰아쉬며 벽의 자리로 돌아와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이게 싸움이구나. 타인과 맞서싸운다는 것.’ 

처음이었다. 누군가와 서로를 공격하려고 마주서는 경험. 고작 초등학생을 상대로 한 짧은 대련이었지만 아드레날린이 몸 안에서 쿵쾅거리며 거칠게 도는 게 느껴졌다. 내내 소심한 성격이었던 탓에 그동안 갈등을 빚거나 대립하는 상황 자체가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몸싸움은 커녕 말싸움조차 해본 적이 없었으니, 난생 처음 맛본 아드레날린의 여운은 도장을 나와 집에 가는 길 내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극적인 아드레날린의 감각이 낯설어서 나는 계속 대련의 순간을 곱씹었다. 이렇게 빨리 대련을 경험해보게 될 줄 몰랐고 너무 갑작스러웠기에 충격이 더 컸던 것 같다.


“너는 힘이 세니까 해 볼만 할 거야. 여자애들 시합은 그냥 힘만 세면 장땡이야.”

관장님이 노란띠를 맨 나를 불러 앉히고 시합에 나가자고 제안하셨다. 유도를 시작한 지 반년도 안되었을 때였으니 구르기만 잘해도 칭찬받던 때였다. 어찌저찌 사람을 넘기면 힘이 세다며 다들 칭찬해주고 기운을 북돋아줬고,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 스스로도 괜히 우쭐해있었다. 시기적으로 너무 이른 게 아닌가 염려도 되었지만 내가 제법 힘이 세긴 한가보다 생각하며 관장님께 시합에 나가보겠다고 호기롭게 답했다.


그러나 막상 시합 날짜를 잡아두고 약 2주 뒤의 시합을 준비하는 동안의 긴장감은 이루말할 수 없이 견디기 힘들었다. 학교가 끝나면 유도장에 가서 시합 준비를 위해 매일같이 익히기와 대련을 반복했다. 알고 있는 기술이 밭다리후리기, 발목받치기, 한팔 업어치기, 양팔 업어치기, 허리 껴치기 정도여서 아는 기술 몇 가지를 연습하고 당기는 힘과 근육을 키우려고 기둥에 묶인 노란 쭈부(튜브, 고무줄)도 당겼다. 주말에는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고 평일 주 2회 정도는 일산까지 가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글쓰기/논술 과외를 했다. 평소와 같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마음 한켠에는 콩닥거리는 긴장감과 설렘이 계속 기저에 깔려 있었다. 버스나 강의실 또는 카페에서 제 역할을 하다가도, 미지의 상대와 낯선 매트 위에서 마주하는 상황을 매일같이 상상했다. 그때마다 가슴이 쿵쿵 뛰다 못해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무참히 져버리면 어쩌지?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입으면 어쩌지? 망신을 당하면 어쩌지? 졌을 때 찾아올 부끄러움이 겁나서 주변의 친구들을 비롯해 가족들에게조차 시합을 나간다는 소식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도 내가 어쩌면 이길 수도 있을 거라는 얄팍한 자신감도 있었다. 도장 안에서는 그래도 꽤 힘이 세다고 칭찬을 들었고 학창시절과 대학에서도 각종 행사에서 나쁘지 않은 체력을 뽐내왔다. 적어도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 거라는 소극적인 배짱도 내심 품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가 밭다리로 밀고 들어오면 이렇게 되치기를 하자! 아니야, 일단 경기 시작하자마자 잡고 바로 업어치기 들어가자, 등등. 

-57kg 체급에 출전하기 위해 계체를 위한 체중 감량도 했다. 야식과 음주를 끊고 식사량도 줄이면서 매일 몸무게를 쟀다. 살면서 각잡고 다이어트를 해본 적이 없어서 고작해야 2-3kg을 빼야하는 감량임에도 많은 인내를 발휘해야 했다. 무엇보다 주말에 일하던 홍차 카페에서 사장님이 내주시는 디저트를 거절하는 순간들이 너무나 힘들었다. 그동안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간에 스스로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습관적으로 군것질을 일삼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카페의 오븐에서 나오는 달콤한 치즈케이크, 쿠키, 쨈과 곁들여 나오는 스콘 등등. 디저트와 야식을 참는 것조차 이렇게 힘든데, 경기를 2,3일 앞두고 물까지 끊어버리는 프로 운동선수들은 대체 얼마나 큰 정신력과 끈기를 가지고 있는 걸까?



시합장의 혼돈

첫 시합을 펼쳤던 경기장이 어디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둥근 경기장에 계단식 관객석이 있었고 1층으로 내려가야 경기장에 입장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잠실학생체육관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을 더듬다가 서울시유도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기록이 남아있었다. 2012년 11월 10일 토요일, 잠실학생체육관.


맙소사, 내 첫 번째 시합이 "제1회 서울컵유도대회"였다니.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알았다.


어찌됐든 시합 전날 관장님은 내게 상대에게 기가 죽어선 안된다며 노란띠 대신 검은띠를 묶어주셨다. 나는 토요일 아침 일찍 계체를 위해 도복과 가짜 검은띠를 챙겨들고 버스와 지하철을 탔다. 가는 길 내내 지난 몇 주 동안의 긴장감과 부담감, 스트레스가 최고조로 뭉쳐 몰려왔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어도 음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합장에 가까워질수록 떨림은 더 심해졌는데 그 이유는 점점 도복을 들고 있거나 도복이 가방에 담겨있는 것 같은 사람들이 군데군데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와 비슷해보이는 체격의 사람을 보기라도 하면 시합 상대이기라도 할까봐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머릿속으로 수없이 그려왔던 시합이 코앞으로 다가왔구나. 이제 진짜 피할 수도 없는 것이다.

도착해서 같은 체육관 사람들이 있는 쪽을 찾아가 짐을 풀고 도복으로 갈아입었다. 먼저 와서 계체를 끝낸 이들도 있었고 도복으로 갈아입고 몸을 풀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도장의 건장한 아이들이 바나나, 초코파이, 빵, 이온음료 따위를 봉지 가득 사와서 풀어놓고 계체를 끝내고 온 이들은 참아왔던 식욕을 풀었다. 다른 체육관들 역시 다투듯 일찌감치 도착해서 경기장 군데군데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계체를 하고 자신의 경기를 기다리며 자고 있는 아이들도 있고 우걱우걱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도 보였다. 나도 체중계가 있는 곳으로 가서 아슬아슬하게 57kg을 맞춰 계체를 통과했다. 그때는 시합이 처음이라 ‘이곳 어딘가에 내 상대도 와있겠다’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혹시나싶어 지난밤부터 굶었던 터라 자리로 돌아와 빵과 음료수를 먹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개회식. 도복을 입은 자들은 모두 내려오라고 하지만 다들 자리에 숨어있곤 한다. 오르락내리락, 앉았다 일어났다 하기가 귀찮기 때문이다.
2012년 11월 10일. 잠실학생체육관. 경기장이 4개뿐이었군.


보통 오전에 초등부와 중고등부 시합을 먼저 치르기 때문에 일반부, 그것도 성인 여성의 시합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시합 자체는 고작해야 2분이었지만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나 고됐다. 시합이 다가오나 싶어 복도에 나가서 관원들끼리 서로 붙잡고 익히기를 거듭하며 몸을 풀었다. 긴장감으로 부풀어오른 가슴은 당최 가라앉지를 않았다. 눈앞에서는 수많은 경기들이 치러지고 있었다. 넘어가고 넘기고, 누르고, 꺾고, 조르고, 울고, 소리지르고, 웃고. 여러 경기장에서 내지르는 관장님, 코치들의 고함 소리와 욕설, 선수들이 외치는 기합 소리, 관원들의 응원 소리에 그야말로 장내는 아비규환이었다. 방송으로 “남자 일반부 마이너스 90kg 참가자들은 3번 경기장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따위의 중요한 이야기가 계속 흘러나왔지만 그 음질이 나빠 소리가 뭉개지면서 들려서 우리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있어야 했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아서 반쯤 포기하고 앉아 있으려니, 아이들이 ‘누나, 누나’ 호들갑을 떨고 코치님이 갑자기 내 덜미를 잡아 이끌었다. 정신없이 코치님의 등을 따라 달려 문을 통과하니 어느새 1층의 경기장 입구였다. 환한 조명과 매트가 멀리 보이고 하얀 도복을 입은 여자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나와 비슷한 덩치의 여자들. 이렇게 유도하는 여자들이 많았구나. 종이를 들고 있는 만두귀의 남학생이 사람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줄을 세웠다. 줄을 선 선수들 옆마다 코치나 관장님이 붙어서 익히기를 받아주거나 어깨를 주물러주며 긴장을 풀어주고 있었다. 그들의 현란한 익히기 몸놀림에 기가 죽었다. 제자리에서 콩콩 뛰는 사람, 긴장했는지 계단 위의 동료들에게 손을 흔들며 빨리 물 한모금을 달라는 사람, 경기를 끝내고 나와 우는 사람, 기뻐서 팔짝팔짝 뛰는 사람. 정신이 없었다. 모여 선 사람들의 머리 사이로 같이 출전한 언니가 시합에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나보다 훨씬 잘하는 언니였는데 언니가 맥없이 업어치기로 넘어가는 걸 봤다. 침을 꿀꺽 삼켰다. 경기장 매트 옆에 나란히 벗어진 누군가의 신발을 보다가 어느 순간 나도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내려놨다. 

“들어가자.”

코치님이 등을 밀고 나는 매트 위에 올라갔다. 말랑한 매트를 맨발로 딛었다. 생각보다 바닥이 딱딱했다. 너무나 창백하고 눈부신 조명이었다. 마치 뙤약볕이 내리쬐는 사막에 서있는 것처럼 눈이 부셨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시야가 아득하게 일렁였다. 심판이 시키는대로 인사를 하고 눈을 떠보니 아지랑이 사이로 하얀 맹수가 다가온다. 옆에서 코치님이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상대가 육박해왔다. 잡기싸움을 했고 양 손으로 상대를 잡았다. 이리저리 힘을 썼지만 기술을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저하는 사이 상대가 안다리후리기를 걸었고 나는 맥없이 뒤로 넘어갔다. 낙법이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그대로 머리를 땅에 박으며 의식을 잃었다. 잠깐 동안이긴 했지만 말 그대로 기절해버렸던 것이다. 후방 낙법이 몸에 배어 있었더라면 넘어가더라도 고개를 세워 뒤통수가 땅에 부딪히는 상황을 방지했겠지만, 그곳에서 나는 그저 노란띠였다.

의식이 돌아와보니 의료진이 달려와 나에게 정신을 차려보라며 뺨을 치고 있었다. 괜찮냐고, 스스로의 이름이 무엇인지 말해보라고 여러 차례 묻고 있었다. 멍청하게 누워서 “에에…” 어눌한 소리만 내고 있는데 코치님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경기장에는 상대가 아직 서 있었다. 마지막 인사는 해야만 했다. 나는 간신히 두 발로 서서 상대와 인사를 하고 악수를 나눴다. 어지러운 머리로 손을 맞잡고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단발머리를 한 상대편이 ‘괜찮으세요?’라고 작게 물었다. 나는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네. 괜찮아요.


뒤늦게 시합장에 오신 관장님은 나의 기절 소식을 듣고 괜찮냐며 등을 두드려주셨다. 관장님께 이만 일이 있어서 가보겠노라고, 죄송하고 감사하다고 꾸벅 절을 하던 순간에도 머리가 계속 어지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경기장을 나와 이화여대 앞에 있는 홍차 카페로 가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했다. 시합 때문에 조금 늦게 출근할 거라고 미리 말씀을 드려놨던 터라 평소보다 두 시간 정도 늦게 출근했다. 

졌다는 것에 대한 분한 감정은 없었다. 부딪혔던 머리가 어지러워서 카페의 홀을 지키는 내내 나무 기둥을 붙잡고 있었을 뿐이다. 얄팍하게나마 자만심을 가졌던 스스로가 부끄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시합을 나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재밌고 흥분한 상태였다. 오늘, 바로 몇 시간 전 나는 시합을 치르고 왔어. 믿어지니? 이 소심한 내가.


요즘 시합을 나갈 때 같이 나가는 관원분들 중에 첫 시합을 나가는 분들을 볼 때면 그날의 내가 떠오른다. 10초, 20초만에 허무하게 패배하고 경기장을 걸어나오면서 터뜨리는 헛헛한 웃음, 그리고 조금은 개운한 얼굴들. 등을 두드리는 서로의 손.

괜찮아요. 처음이란 으레 그런 거잖아요. 그래도 우리 지금 너무 재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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