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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도인 박대리 Sep 11. 2023

업어치기가 얼마나 멋진 기술인데!

“메치기” 아름답고 무해하게 나를 지키는 방법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길게 이어지는 격투 장면 자체는 지루하게 느끼긴 하지만, 어떤 복잡한 문제든 무력으로 해결하는 명쾌함과 단순함을 관람하고 있노라면 현실의 구구절절한 갈등으로부터 잠시나마 도피할 수 있게 된다.(물론 그와 같은 자극적인 영상을 받아들일 때 현실적인 감각으로부터 동떨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격투씬을 보다보면 주인공이 등 뒤에서 목을 졸리거나 멱살을 잡혔을 때 상대를 업어치기로 넘기는 장면들이 종종 나오는데 그때마다 ‘유도다!’ 하고 혼자서 흥분해서 탄성을 지르곤 한다. 영화 <범죄도시>의 주인공 ‘마석도’라는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격투의 베이스가 복싱이지만 액션씬 틈틈이 업어치기를 선보였고 그때마다 괜히 내가 흐뭇했다. 영화를 보고 나와 친구들에게 아까 유도 기술 나오는 거 봤냐고 흥분해서 말해봤지만 다들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심지어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에서는 1화부터 주인공이 어린 시절 유도를 배웠다는 설정이 나오고 이후의 격투씬마다 하정우 배우분이 유도를 주기술로 선보이며 활약했다. 당시 <수리남>이 한창 인기가 있을 때 유도관 사람들과 ‘<수리남> 보고 유도 배우러 오는 사람들 많겠어요.’라며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지만, 드라마를 봤다하는 친구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유도를 배웠다는 설정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저 유도인들의 눈에만 보이는 모양이다. 업어치기가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기술인데! 


영화 <범죄도시3>의 주인공 '마석도'는 격투 베이스가 복싱에 있다.(간간이 유도 기술도 엿보인다.) 후려치는 족족 "펑" 터지고 날아가는 소리가 나는데 이건 그냥 초능력인가?




유도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왜 유도를 배우냐고 물어보면 많은 이들이 ‘멋있어서’라고 답변한다. 무슨 기술을 제일 배우고 싶냐, 고 물어보면 대부분 업어치기를 얘기한다. 그렇다. 업어치기는 유도의 꽃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태권도와 같은 무도 계열의 학원을 다니고 싶었지만 부모님과 뜻이 맞지 않아 피아노 학원에 다녔더랬다. 이십대 초반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스스로 푼돈이나마 벌게 되면서 처음으로 내가 배우고 싶은 운동을 선택할 수 있게 됐다. 학교 인근에는 태권도, 무에타이, 복싱 등 다양한 무도 계열의 학원이 있었다. 나는 이곳저곳 전화를 돌려 비용과 시간표 등을 따져가며 고민하다가 제일 배우고 싶었던 유도로 결국 마음을 굳혔다. 그때 내 마음이 유도로 굳혀지는 데에 크게 영향을 준 사건이 있었다. 내 인생 처음으로 바로 눈 앞에서 유도를 목격했던 날이다.


대학교 2학년 때 즈음이었을 것이다. 같은 과 동기와 선배와 가진 조촐한 저녁 술자리였다. 나는 그날 노트북을 챙겨왔던 날이라 막무가내로 만취하기가 조심스러워 평소와 달리(?) 술을 조금밖에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셋이 나누던 얘기가 제법 무거워졌던 건지 그날 나를 제외한 두 사람이 술을 많이 마셨고 초저녁부터 취해버렸다. 동기는 취해서 길거리 어디론가 사라졌고 선배는 주사가 심한 사람이어서 내가 부축하고 뜯어 말려도 자꾸만 달려 나갔다. 덩치가 큰 사람은 아니었지만 술에 취한 남자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사고라도 날까봐 선배의 옷깃을 붙잡고 진땀을 빼고 있는데 누군가 신고를 했는지 경찰관 두 명이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났다. 젊고 거대한 덩치의 경찰관 한 명과 연배가 좀 있어보이는 체구가 작은 경찰관 한 명이었다. 그들은 우선 술에 취한 선배를 좋게 말로 타일렀다. 만취한 선배는 경찰 제복이 눈에 안 들어오는지 계속 힘을 쓰며 소리를 지르고 땡깡을 부렸다. 나는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말리려는데 상관으로 보이는 나이 든 경찰관이 곁의 젊은 경찰관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젊은 경찰관이 고개를 끄덕이고 술에 취한 선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갑자기, 선배의 두 다리가 허공을 갈랐다. 지금 와서 그 기술을 돌이켜보면 그건 ‘허리 껴치기’였을까? 기술을 걸었던 경찰의 체구가 컸던 탓에 선배는 허공에 높이 붕 떴다. 바닥에 떨어져 엎드린 자세가 되더니 곧바로 등 뒤로 수갑이 채워졌다.


빠르고 담백한, 깔끔한 메치기였다. 넘어간 사람이 비명도 지를 수 없을 만큼 물흐르듯 부드러웠다. 무엇보다도, 참 아름다웠다. 메치기는 손이나 발을 이용한 직접적인 타격 없이, 상대를 상처입히지 않으면서 제압한다. 바닥에 떨어뜨리는 동작일지라도 유도의 메치기본을 보면 기술을 걸어 상대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잡고 있는 상대의 손을 잡고 위로 끌어올려 준다. 바닥에 떨어지는 충격을 완화해주기 위한 배려와 존중이다. 함께 맞잡아주는 상대는 서로의 수련과 발전을 위해 바닥에 몸이 떨어지는 위험을 감수해주는 고마운 존재니까. 나는 그 강한 부드러움과 다정함을, 유도를 배우고 싶었다.




밀면 당기고, 당기면 민다

유도의 메치기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일단 상대의 무게중심을 빼앗는 것이 시작이다. 잡기싸움을 거쳐 상대의 소매깃, 목깃 또는 등을 틀어잡고, 서로 밀고 당기면서 상대의 무게중심을 흐트려 놓는다. 무게중심을 잃고 한 방향으로 상대의 몸이 기울어지면 그때가 공격 찬스다. 그렇기에 메치기는 ‘기울이기’가 첫 단계다.(상대의 깃을 잡는 ‘잡기’를 첫 단계로 보기도 한다.) 메치기 중 손기술인 업어치기를 예로 들자면, 상대를 끌어당겨 뒷꿈치가 들리도록 기울이고 그 가슴 앞으로 파고들어 스스로 지렛대가 된다. 상대의 겨드랑이에는 팔이나, 목깃을 말아쥔 팔꿈치를 단단히 끼운다. 이렇게 상대를 메치기 위한 준비 자세가 다 갖춰졌다면 ‘지읏기’ 단계가 완성된 것이다. 이제 이미 앞으로 몸이 기울어진 상대를 내 등에 업듯이 바싹 밀착시키고, 쥐고 있던 상대의 깃을 쭉 잡아 당긴다. 마지막 ‘걸기’ 단계다. 앞으로 완전히 기울어진 상대는 나의 손에 이끌려 바닥에 메다꽂힌다. 그러므로 상대가 나보다 무겁고 거대한 체급일지라도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여 제압할 수 있다. 상대가 밀면 당기고, 당기면 민다. 그것이 곧 부드러움이 능히 강함을 제압한다는 ‘유능제강’의 원리다.


키 160cm에 타고난 힘 조금, 허리에는 흰띠를 두르고 있던 나는 그 유도의 원리가 너무나 솔깃했다. 나같이 작은 사람도 유도를 열심히 수련하면 나보다 더 크고 강한 타인을 이길 수 있다. “강해질 수 있다.” 만년 겁쟁이에 소심뱅이로 살아왔던 나에게는 너무나 달콤한 이야기였다. 나는 하루 빨리 일격필살(?)의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흰띠를 매고 구석에 앉아 선배들의 대련을 보다가 업어치기로 깔끔한 한판을 만들어내는 순간들마다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손기술, 발기술, 허리기술 등 여러 메치기가 있었지만 나는 일단 ‘유도’라고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기술인 ‘업어치기’를 잘하고 싶었다. 메치고 난 뒤의 임팩트도 크고, 일단 멋있잖아. 발기술인 밭다리후리기와 발목받치기를 먼저 배우고 익히며, 오매불망 업어치기 배울 날을 기다렸다.


드디어 처음 한팔 업어치기를 배웠던 날. 그나마 배우고 해왔던 밭다리후리기나 발목받치기와는 결이 다른 움직임에 진땀을 뺐다. 지금이야 단계가 나뉘어지지 않고 디딤발을 딛고 이어서 한 스텝에 바로 업어치기에 들어가지만 처음 배울 때는 3단계로 나누어 차근차근 자세를 가다듬어야 했다. 고장난 로보트 마냥 팔에 신경을 쓰면 스텝이 꼬였고, 다리를 신경쓰면 어깨 위로 상대방의 겨드랑이가 올라갔다.

첫날이었으니 엉망진창인 게 당연하긴 한데, 그날 집에 돌아오던 길의 내 기분을 잊을 수 없다. 마치 한 마리 맹수가 된 것 같았다. 필살 기술을 배웠으니 세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동네 건달이 나타나 돈을 내놓으라고 해도 무섭지 않으리라. 오늘 배운 기술을, 내 힘을 시험해보는 것이다. 웃기게도 버스 유리창에 비친 내 눈은 이글이글 매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 되었으니까.



그때는 오히려 대련 경험이 부족했기에 그런 잔망스러운 생각을 했으리라. 깡패는 커녕 도장의 매트 위에서 초등학생도 넘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대련을 거듭하고 띠의 색깔이 여러 차례 바뀌어 가면서, 한팔 업어치기를 비롯한 유도 기술들이 하루, 이틀 연습한다고 바로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동작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나 나처럼 운동 신경이 없고 스무살이 되도록 특별히 따로 운동을 해오지 않았던 일반적인 생활체육인으로서는, 오랜 시간 수련하고 다양한 상황에서 수차례 응용해보아야 한번이나 제대로 써볼 수 있을까 말까였다. 그래서 나는 영화나 소설에서, 지나가듯 가볍게 배웠던 호신술을 절체절명의 순간에 요긴하게 쓰는 주인공들을 볼 때마다 고개를 젓는다. 예를 들면 <골든슬럼버>라는, 한국에서 강동원 배우분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일본 소설이 있다. 주인공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내내 도망을 다니는데, 오래 전 친구에게 장난스레 배웠던 밭다리후리기로 위기의 순간들마다 목숨을 구한다. 소설을 읽으며 처음에는 유도 기술이 나온 것이 반가워서 흥분했고, 그 다음에는 ‘이게 가능할 리 없어. 밭다리후리기도 매일같이 연습해야 실전에 쓸 수 있는 어려운 기술이라고! 나만 몸치인 거야?’라며 분개했다.(몸치의 열등감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수련 기간이 십 년 정도 된 지금의 나는 과연 길 위에서 누군가 시비를 걸어오면 완벽히 유도 기술을 구사할 수 있을까? 몸이 얼어붙거나 그저 도망치기 바쁠 것이다. 배짱으로만 보면 오히려 흰띠, 노란띠 때 더 무시무시한 기세가 있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도장에서 흰띠, 노란띠를 맨 분들과 맹렬히 대련을 할 때면 항상 ‘역시 이때가 제일 무서울 때에요.’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한다.


지금의 내가 즐겨쓰는 주기술은 업어치기다. 그 중에서도 낮게 무릎을 꿇으며 상대의 두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낮은 업어치기. 흰띠 때의 염원대로 업어치기가 주기술이 됐다기보다 작은 체격에 걸맞는 기술이 업어치기였다. 업어치기는 상대보다 몸을 낮춰서 들어가는 기술이다보니 체격이 작은 사람에게 유리하다. 상대의 왼팔을 들어 당기며 오른쪽 팔꿈치가 상대의 겨드랑이로 파고든다. 그와 동시에 상대의 두 다리 사이로 무릎을 꿇으며 파고든다.(이때 무릎과 정강이, 발등이 평행하게 바닥에 동시에 떨어져야 무릎에 가해지는 충격이 분산된다. 그렇게 하더라도 사실 무릎에 건강한 기술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나에게 있어서는 마치 맛집의 인기 메뉴처럼 하루에 쓸 수 있는 횟수가 제한되어 있는 기술이다.) 기술이 들어가기 직전의 ’지읏기‘ 단계가 온전히 완성됐다는 느낌이 들 때면 머리 안에서 ‘찰칵’하고 어떤 부품이 맞춰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왼팔을 당겨안으며 몸을 왼쪽 사선으로 감는다. ‘팡’ 소리가 나며 상대가 눈앞에 떨어진다. 바로 이어서 잡고 있던 오른팔을 겨드랑이에 끼고 곁누르기에 들어간다. 내가 느끼기에 깔끔한 한판일지라도 곁에 선 심판이 어떻게 판정을 내릴지 모르니까.(만약 ‘절반’을 선언한다면 경기는 그치지 않고 그 상태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누르기 찬스를 놓쳐서는 안된다.)



한판을 만들어내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나름대로 타이밍 좋게 기술을 걸었어도 자세가 잘못되면 상대가 도망치거나 되려 되치기로 나를 넘기기도 한다. 상대가 더 빠르게 예측하고 방어할 수도 있고. 그렇기에 깔끔하게 상대를 메쳤을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한판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매일 도장에서 메치기와 익히기를 거듭한다. 때때로 대련을 많이 했는데도 한번도 한판을 내지 못하고 체육관을 나서는 날이 있다. 그럴 때면 스스로가 감을 잃었나 싶어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고, 단이 이만큼이나 올랐는데 ‘물경력’이라는 말마따나 혼자만 내내 제자리걸음인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다.


유도가 뜻대로 풀리지 않아 의기소침한 날이면 그날의 유리창을 떠올린다. 업어치기를 처음 배웠을 뿐인데, 그 누구도 메쳐보지 못했는데도 스스로가 한 단계 강해졌다고 느꼈던 그날의 흥분을. 그날부터 계속, 나는 나의 메치기를 만들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 거다. 언젠가 오늘의 이 의기소침한 나를 반추하며 어떤 이유에서든 웃으며 가여워하자.


아름답고 무해한 메치기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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