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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도인 박대리 Aug 30. 2023

광배근이 뭔데요?

유도가 내 “몸”에 새긴 크고 아픈 선물들


“워, 너 등이 왜 이래? 이거 광배 봐라.”

종로YMCA 유도장에서 운동하던 2단 시절. YMCA의 체육시설에는 유도 외에도 수영, 검도, 헬스 등 다른 체육 프로그램도 많아서 샤워장과 탈의실이 제법 넓었다. 덕분에 저녁 운동이 끝나면 같이 수련하는 여성 관원들과 다같이 씻으면서 나체로 까불곤 했는데, 물줄기를 맞으며 머리를 감는다고 두 팔을 들고 있으니 등에서 근육이 불거져 올라왔던 모양이다. 광배를 운운하던 언니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이 다같이 낄낄거리며 내 등을 쓸어 만졌다. 나도 거울에 등을 비춰봤지만 근육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 등 뒤라 잘 보이지도 않아, 그저 농이겠거니 웃어넘겼다. 그런데 그 뒤로도 종종 한의원 진료중에, 또는 내 벗은 등을 본 가족들, 친구들에게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렇다보니 유도를 하며 신체의 변화를 가장 크게 느꼈던 부위는 광배근이었다. 배밀기를 많이 한 덕분인지 쭈부(=고무 튜브)를 많이 당긴 덕인지. 아무튼 그 변화를 나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알게 된 터라, 생각지도 못한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마치 ‘너에게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했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언제부터인가 광배근은 내 숨은 자랑이 되었다. 물론 헬스를 하는 사람들처럼 균형있고 아름답게 단련시킨 몸은 아니다. 초단과 2단 즈음의 나는 다른 운동 없이 오직 유도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적어도 맨몸 스쿼트나 플랭크, 유산소 운동인 달리기라도 병행했으면 체력적으로나 유도의 기술 면에서도 더 성장할 수 있었을텐데. 나아가 광배근 뿐만 아니라 다른 근육들도 골고루 발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스무 살 즈음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아쉬움이다. 먹는 걸 워낙 좋아하다보니 어린 시절부터 늘 살과의 전쟁이었다. 체육 시간에 수행평가를 위해 줄넘기나 배구공을 들고 깔짝 움직였던 게 최대한의 운동 경험이었으므로, 근육은 커녕 그저 살집 없이 말라서 옷태가 예쁘게 사는 호리호리한 체형이 되고 싶었다. 살찐 엉덩이와 허벅지, 종아리가 부끄럽고 싫었다. 여느 옷가게를 가든 매장의 옷걸이에서 마음에 드는 바지를 골라 입어보고 당장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비의 삶이란, 옷가게에 비치된 검은색 바지들 중 ‘L’ 또는 ‘XL’ 사이즈들을 그러모아 탈의실에 들어가는 것이다.(검은색은 축소색이라 밝은 색상보다 그 형태를 좀더 말라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좁은 방에 서서 끙끙거리며 허벅지와 엉덩이에 바지를 끼워보다가 옷이 비명을 지르기 직전에 포기한다. 벗은 바지들을 다시 집게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어 반납하고 터덜터덜 가게를 빠져나오는 것.

유도를 하는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다. 그러나 빈 손으로 매장의 문을 나서며 그것에 대해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는다. 커진 광배근 때문에 웬만한 원피스의 등 지퍼가 올라가지 않게 됐다는 걸 알게 됐을 때는 오히려 흐뭇하기까지 했다. 호리호리한 몸이 보여주는 가냘픈 곡선도 사랑하지만 굵고 두툼한, 탄탄한 근육으로 뭉친 몸도 사랑하게 됐다. 즉, 유도를 시작하고 나는 내 몸이 제법 사랑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운동을 못하게 된다면

요즘은 오히려 어깨와 팔다리가 가늘어질까 봐 걱정이다. 팔굽혀펴기와 배밀기, 스쿼트 등을 꾸준히 한다. 체육관에 못 가게 되는 날은 집에서라도 맨몸 운동으로 근육을 단련한다. 언제부터인가 하루라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살이 찌고 근육이 사라질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2020년 즈음 코로나로 체육관을 다니지 못했던 때에는 신림역 인근의 집에서부터 홍대 입구역에 있는 회사까지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다. 대중교통에 사람들과 꽉 부대껴있는 상황이 염려스럽기도 했지만 사실은 어떻게든 운동량을 확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양화대교를 건너 회사에 가기까지 편도로 50분 정도가 걸렸다.(심지어 살고 있는 원룸에 실내 자전거 숀리 바이크까지 사서, 날씨가 궂어 자전거 출퇴근을 하지 못하는 날에는 퇴근 후 집에서 1시간 가량 페달을 밟았다.) 그렇게 유산소 운동은 꾸준히 하게 되어 체력은 유지할 수 있었지만 체육관에 다닐 때만큼 근력 운동을 충실히 하지 못했다. 팔다리의 근육이 빠지는 게 느껴져서 불안하고 우울한 나날들이었다.

코로나 때야 자전거라도 탈 수 있었지만 운동 중에 근육이나 인대, 뼈를 크게 다친 경우에는 상황이 더 나빴다. 오른손잡이임에도 늘 잡기 싸움에서 불리하게 잡히다보니 왼손 기술 잡기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2단 때까지는 평소에 익숙하지 않은 왼쪽으로 무리하게 기술을 들어가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주말, 가볍게 대련을 하다가 또 왼쪽으로 빗당겨치기를 무리하게 시도했다. 굽혀진 왼쪽 무릎 위로 상대가 쓰러지면서 갑자기 “뚝!” 하는 큰 소리가 났다. 내 무릎에서 나는 소리인 줄도 몰랐다. 처음에는 통증도 없어서 당사자인 나는 어리둥절해 하고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놀라며 나를 도장 가장자리로 데려가서 앉혔다. 다리를 일자로 펼 때, 그리고 걸으려고 일어나 왼발을 땅에 딛을 때 통증이 일었다. 바로 택시를 타고 응급실로 갔다. 왼쪽 무릎의 내측 인대가 손상됐고, 다행히 끊어지진 않았으나 당분간 반깁스를 해야 했다. 운동은 당연히 쉬어야 했다. 그날 이후 한동안 목발을 짚고 절뚝이며 다녔다. 종로의 집에서 강남의 회사까지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출퇴근을 하는 시간은 정말 고역스러웠다. 다행히 반깁스라 씻을 때는 붕대를 풀고 부목을 떼어놓을 수 있었지만 생각보다 회복이 더뎠다.



생활이 불편한 것도 힘들었지만 운동을 할 수 없으니 몸이 근질근질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근육이 쭉쭉 빠져서 비실비실해지는 것 같았고 거울을 보면 계속 얼굴에 살이 붙어 무럭무럭 커지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매일같이 땀을 한껏 흘리던 시간이 없어지니 한없이 우울했다. 땀을 잔뜩 쏟아내던 배출의 시간이 더없이 간절했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몸을 부딪히던 감각도 그리웠다. 약 6개월을 그렇게 답답하게 지내다가 반깁스를 어느 정도 풀고 일상적인 걸음에서 통증이 사라졌을 즈음, 나는 참지 못하고 무릎 보호대를 챙겨 도장에 복귀했다. 오랜만에 뵙는 관원들이 반갑게 인사하며 무릎의 안부를 물었고 나는 당분간 대련은 어려울 거라고 양해를 부탁드렸다. 오랜만에 입어보는 도복이었지만 띠를 묶는 방법은 손이 기억하고 있었다. 익히기를 하며 맞잡는 사람마다 나더러 이제 완쾌한 것 같다고, 어떻게 쉬는 동안 업어치기를 까먹지 않았냐고 농을 쳤다. 웃고는 있었지만 사실 여전히 왼쪽 무릎으로 힘이 실리면 불안하고 위태로운 느낌이 들었다. 왼쪽 무릎을 접은 상태로 오른쪽으로 기울이면 내측 인대가 늘어나면서 찌릿, 작은 통증이 일기도 했다. 오래도록 운동을 쉰 몸은 전체적으로 말랑하고 약해져서 종잇장 같았다. 그 와중에 마음 속으로는 습관처럼 예전처럼 움직이려는 몸뚱아리의 조바심을 꾹꾹 내리눌러야 했다. 조금만 방심해도 왼쪽 무릎은 뾰족한 비명을 질렀고 나는 그때마다 서둘러 무릎을 달래주고 잠들기 전에는 뜨거운 물주머니로 찜질을 했다.

한번 다쳤던 무릎은 예전만큼의 기량으로 돌아오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아니, 지금도 사실 백 퍼센트 회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되려 왼쪽이 회복하는 동안 오른쪽 무릎이 더 무리하게 되면서 요즘은 오른쪽도 말썽이다. 그때 좀더 운동을 쉬고 완전히 회복되기를 뭉근히 기다렸더라면 지금 무릎의 상태가 좀더 나았을까?


이후로는 대련을 할 때 승패보다는 부상을 제일 주의한다. 지금 이 순간의 재미, 쾌감, 승부욕도 참을 수 없지만 한 순간의 무리한 욕심으로 향후 최소 반년에서 1년은 제대로 운동을 하지 못하는 암흑기에 접어들 테니까. 물론 유도를 한창 하는 시기에는 팔다리가 돌아가면서 부상을 입곤 한다. 부상의 신(神)이 몸에 들어와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느낌이랄까. 어느 날은 무릎이 안 좋아 보호대를 한참 차고 어느 날은 어깨를 다쳐서 어깨 보호대를 한다.(신기한 건 내내 통증에 신경쓰였던 무릎이, 어깨를 다치고 나면 어깨에 신경이 쏠리는 덕인지 불편감이 사라지곤 했다.)

요즘은 오른쪽 어깨가 말썽이다. 몇 주 전, 100kg 즈음 되어보이는 중년의 남자분이 ‘어깨로 메치기’를 알려달라고 했다. 관장님이 도장에서 대련할 때는 되도록 쓰지 말라고 언질을 주셨던 기술이지만 대련 상황도 아니었고 부탁을 한 관원분도 검은띠셔서, 기술을 알려드리더라도 잘 익히시고 적절히 활용하실 거라 생각했다. 설명을 해드리고 시험 삼아 나를 메쳐보라고 했는데, 역시나 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오른쪽 어깨가 상대에게 쭈욱 감겨들어가더니 어깨로 바닥에 떨어지면서 1차 충격이 왔고, 바닥에 누운 내 위로 그의 육중한 몸이 얼굴과 상체 위로 떨어지면서 2차로 충격이 왔다. 덕분에 한동안 점심 시간마다 회사 인근의 한의원에 가서 거북선처럼 침을 맞았다. 저녁에는 한여름인데도 뜨거운 물주머니를 어깨에 올려놓고 잔다. 시간이 약이라고 점점 통증은 덜해졌지만 여전히 팔을 들면 찌릿, 하고 아프다. 유도관을 가긴 하지만 네 발로 기거나 전방회전 낙법을 할 때면 몸이 바짝 긴장을 한다. 상대가 업어치기로 나를 메치고 잡아준답시고 내 오른팔을 쭉 당기면, 어깨가 위로 당겨올라가면서 찢어질 것처럼 아프다. 이 어깨는 또 언제까지 이 모양일까. 운동이 끝나고 도복을 벗고 거울을 보면 나는 어딘가 낡은 깡통로봇처럼 보인다. 도복 안으로 감추고 있던 무릎 보호대와 어깨 보호대가 마치 끊어진 파이프를 전기 테이프로 얼기설기 감아둔 것처럼 어설프다. 아마 먼 훗날 또래 친구들이 효도 관광 다닐 무렵에 나는 누워만 지낼지도 모르겠다.


늘 이런 상태다보니 30대에 접어들고 나서 유도를 할 때면, 준비운동을 시작하며 늘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유도일 수도 있다’는 마음을 되새긴다. 부지불식간에 마지막은 찾아온다. 언젠가 아기를 가지게 될 수도 있고, 나이가 더 들면 몸이 무리한 운동을 감당하기 어려운 시기가 반드시 찾아올 터다. 어딘가 심한 부상을 입고 더이상 유도를 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아직 유도를 더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내 마음은 얼마나 잘게 부서질까? 거울에 등을 비춰보며 작게 쪼그라든 광배근을, 납작해진 등과 가늘어진 어깨를 바라보며 나는 어떻게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내 앞에 유도를 할 수 있는 날들이 얼마나 남아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지금 유도를 하는 시간, 함께 맞잡아주는 유도관의 동료들, 무리한 욕심에 맞추어 움직여주고 있는 내 몸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치열하게, 그러나 즐겁게 유도하는 날을 하루, 하루 더해갈 뿐이다.


그래서 유도를 할 수 없게 되는 날이 온다면 어떡할 거냐고? 그때는 또 그때의 내가 즐길 수 있는 재밌는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나에겐 또 사랑할 만한 구석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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