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면으로 나들이 가다
중학교 다녔을 때는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약 한 시간 정도 걸렸다.
학교 가는 길에는 요천이라는 강을 건너야 하는데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다리가 없어서 늘 뱃사공이 있는 배를 타고 가야 했다. 강은 넓었고 특히 강가 쪽은 수심이 깊어 흐르는 물살이 셌다. 따라서 배를 호수 위에 그림처럼 낭만적으로 띄우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 줄을 튼튼하게 매달아 줄에 갈고리를 걸고, 사공이 줄을 잡아당기며 오고 가는 방식이었다. 그것도 비가 많이 와서 강 수위가 높아지면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따라서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학교를 갈 수 없었고, 집에서 자율학습을 해야 했다. 반대로 가뭄 때는 강물이 줄어들어 그때도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등교하면서 아침부터 바지를 바짝 걷어올리고 강을 건너야 했다. 남학생들은 그런대로 옷을 젖어가면서까지 겨우 건너갈 수가 있었는데, 여학생들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학교를 가지 않은 친구들도 많았다.
당시에 요천은 청정한 강으로 1 급수였고 섬진강 하류에서 올라온 은어가 많았다. 홍수 방지를 위해 보가 생겼는데, 보 아래에는 남대천의 연어들처럼 보 위로 뛰어오르는 은어들이 그렇게 많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수십 마리의 은어를 잡아 가져가기도 했다. 특히, 외지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낚시꾼들이 엄청난 양의 은어를 잡아가기도 했다. 은어낚시는 보통 물고기와 다른 점이 미끼를 물어서 낚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몸통이 낚싯바늘에 걸려서 한꺼번에 여러 마리가 잡혔다. 그것을 훌치기라고 했고 그만큼 은어가 많았다. 그런 요천이 지금은 죽은 강이 되어버렸다. 시멘트 공장이 들어서서 강의 생명인 모래를 다 파내버렸고, 또 축사들이 군데군데 들어서면서 강이 오염되어 버렸다. 어렸을 적의 자연 그대로의 강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요천은 섬진강의 주 지류 중의 하나로 전라북도 장수군 장안산과 팔공산에서 발원하여 장수와 남원을 지나는 젖줄이다. 우리 동네 앞을 지나는 요천은 금지면 하도리에서 섬진강 본류와 만나 섬진강은 압록에서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 본 줄기는 구례를 거쳐 하동과 남해안으로 흐르고, 다른 한 줄기는 압록에서 보성강으로 바뀌어 주암호 방향으로 흐른다. 섬진강 상류 쪽으로 올라가면 섬진강의 다른 이름들이 나온다. 임실→순창→장구목을 지나는 섬진강을 적성강으로 이름하고, 남원→곡성→신기어림을 흐르는 섬진강을 순자강이라고 부른다. 그러고 보니 중학교 교가에 순자강이 나왔는데 당시 순자강이 어느 강인지도 모르면서 교가를 불렀던 것 같다. 그 요천의 물줄기를 따라 섬진강 본류로 가면 아직은 은어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 같다. 가을 추석 명절을 쇠고 아들들과 함께 화개장터 인근에 있는 섬진강 황토방을 찾았던 아버지의 일기.
하동 화개면 영당마을로 애들과 같이 나들이를 갔다. 섬진강 하류로 놀러 온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은어를 낚아 올리는데 가서 보니 커다란 대야에 여러 마리가 들어 있었다. 은어가 예전에는 요천에도 많았는데 지금은 보기가 드물다. 아마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여기서 오랜만에 처음 보았다. 숙소는 황토방으로 꾸며 있다. 시설이 깨끗하고 경치도 좋다. 앞산, 뒷산이 높고 저 아래로 흐르는 물이 섬진강이다. 섬진강은 적성강, 순자강을 거쳐 곡성 장선리에서 합수하여 섬진강 본류와 만난다. 다음 날 아침은 숙소에서 먹고 점심은 구례에서 먹었다. 밥 한 상에 만 원인데 참게탕이 따라 나왔다. 비교적 맛이 있었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도착했다. 아들들이 모두가 떠났다. 밀린 일이 심란하다. - 섬진강 하류, 어느 황토방에서 2014.9.9.-10 (추석 연휴)
다들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부모님과 자주 나들이하는 것도 아닌데, 아들들과 함께 나들이하시면서 아버지의 기분이 별로 즐겁지 않은 눈치다. 일기의 길이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마음이 편치 않으신 것이 분명하다. 지금 아버지는 몸은 섬진강 황토방에 왔지만, 마음은 논밭 일터에 두고 오신 것이 역력히 보인다. 그 마음의 심경이 '밀린 일이 심란하다'는 글로 당시 아버지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아버지의 일기는 거의가 농촌 일에 대한 것이었다. 거의 비슷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여기에 옮기지 않을 뿐이지만, 빼곡한 일기장을 읽으면 읽을수록 농촌의 고단한 일에 대한 사실적 묘사로 가득 차 있다. 그만큼 농촌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의 연속이다. 그런 일상 가운데 휴식을 취하러 아들들이 함께 나서자고 한 것인데 여전히 마음은 쉬시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2017년 10월 초, 그때는 추석 연휴가 길었다.
어머님 팔순 기념으로 식구들이 추석날 아침 추도예배와 성묘를 드린 뒤 곧바로 부모님을 모시고 똑같은 곳을 찾았다. 식구들이 많아서 미리 더 큰 장소를 찾아 예약한 곳이었다. '흙집 섬진강ㅇㅇ', 그곳에서 다섯 아들이 며느리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짜고 역할을 분담했다. 손주들은 재롱잔치로, 아들, 며느리들은 장기자랑으로 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렸고, 손편지를 써서 감동적인 시간도 만들었다. 낮에는 화개장터로 가서 구경도 하고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낚시를 가기도 했다. 저녁에는 야외에서 삼겹살 파티를 했다. 그런데 그때도 부모님의 표정은 시골에 좋은 집 두고, 돈 들여 가며 여기까지 꼭 와야 하는지 그런 표정이셨던 것 같다. 말씀은 하시지 않았지만 '밀릴 일에 대한 심란함'이 아마도 두 분의 마음을 휘젓고 다니지 않았을까, 이제 와서 지난 일기를 보니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물론, 이때의 감동을 글로 남기실 법했는데 이상하게도 이때의 일기는 쏙 빠져 있다. 열흘이 지나고 난 후에야 시작된 일기의 첫머리.
내가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다. 일기가 이렇게 중요한 때 빠져버렸다. - 2017.10.14
아마도 그때, 그 감동의 순간을 다시 떠올려 적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버지는 그러시지 않았다. 일기를 누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 혼자만의 비밀의 화원이었기에, 굳이 빠진 것을 채워가려고 하시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큰아들이 이렇게 샅샅이 아버지의 비밀을 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시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일기장을 펴놓고 글을 쓰는 지금, 꼭 아버지가 위에서 보시고 '아, 얘야, 민망하게 그걸 보냐, 빨리 내놔라!' 하시는 것 같다. 그래서 이제 덮어야겠다. 하지만, 내 생각까지 덮을 수는 없다. 왜, 아버지는 그렇게 마음의 여유를 가지시지 못했을까. 왜, 평생 하시는 농사일에서 마음을 떼시지 못했을까. 나들이를 할 때뿐만이 아니었다. 서울 아들들 집에 갈 때도 하룻밤을 제대로 보내시지 못했다. 멀리 관광을 가셔도 당일치기로 다녀오셔야 했다. 늘 그 시골일 때문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평생을 일에 묻혀 사시다가 그렇게 가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