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내 고향 산천
아버지는 여러 곳에 관광을 많이 다니셨다. 마을에서 농사일이 한가할 때 주로 국내 여러 곳에 버스 관광으로 당일치기로 다녀오신 것 같다. 그런데 항상 다녀오신 후에는 내 고향 산천만 못하다고 하셨다. 사실, 다른 더 좋은 곳들도 많은데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정든 고향이고 포근해서 그러셨을 것이다. 또 과거 어린 시절 일제 강점기나 해방 이후 전쟁과 보릿고개를 넘었던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 먹고사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여한이 없는 삶이라고 자주 말씀하시곤 했다. 그런 표현들을 자주 일기에 남기셨다. 얼마나 어렸을 때 힘들고 어려웠으면 이런 먹고사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을까. 그것은 죽느냐 사느냐 생존의 문제였다.
사실 우리는 5형제이지만 그때는 다들 가난하면서도 아들딸을 8~10명 정도 낳았고, 그중에서 2-3명이 죽는 일은 다반사였다. 우리도 아들만 총 여섯이었는데 하나가 병으로 떠났으니, 농촌에서 어릴 때 맞이하는 죽음은 그저 일상의 일이었다. 그런 시절을 넘어오신 우리네 부모님들. 우리는 그분들의 땀과 희생의 터 위에서 자라난 운 좋은 사람들인 것은 분명하다. 아버지의 일기를 보며 그간 간과해 온 우리 부모님 세대들의 한 많은 삶을 다시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크게 빚진 마음이 되어 보이지 않는 이미 지나간 그분들의 고통을 마음으로 어루만져 드려 본다. 사실, 나도 정신없이 살았기 때문일까. 알기를 보기 전까지는 그 세계까지 깊숙이 들어가지도 못했고, 별로 자세하게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오늘도 나는 잘 살았다. 밥도 반찬이 있든 없든 구미가 있어 맛있게 먹는다. 또 내가 세상에 나와 눈에 보이는 내 동네, 이웃 마을, 요천수 건너편 금지 들판, 내 쪽 송동 들판, 가까이는 진등산 너머 수지면 병풍 치듯 보이는 먼 산과 들, 다 보았다. 날마다 보던 산천 논밭, 평야, 날마다 보는 아름다운 환경, 관광을 가보지만 이런 곳은 없다. 이것을 정든 고향 산천이라고들 한다. 고향은 그리운 곳, 보고 싶은 곳, 언제라도 잊지 못할 곳, 이 고향에서 떠나지 않고 세상을 다할 때까지 보면서, 같이 호흡하면서 사는 것이 나는 여한이 없는 삶이라고 생각하고 머릿속에 그려 넣어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갈 것이다. 내가 살던 내 고향, 나는 오늘도 고향을 버리지 않고 이 아름답고 정든 이곳을 보면서 여한이 없는 기쁨 속에 잠겨보련다. 내 집이 이렇게 좋다. 눈비가 올 때 막아주고 맛있는 음식이 내 집 안에서 나온다. 추울 때는 따뜻하고 더울 때는 시원하고 아들들 낳아 길러내던 이 집이 얼마나 좋은지, 그래서 옛사람들이 보금자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보면 볼수록 행복하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이만한 즐거움과 행복이 어디 있겠는가. -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2016. 일자 미상
아버지의 눈에 비친 고향 산천은 이 세상에서 그 어디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세상이었던 것 같다. 연명하기도 힘들었던 어려운 시절을 지나오면서, 이제는 집도 짓고 농사일도 하며 살아가는 일상이 어쩌면 당연한데도 당연한 삶이 아닌 감격스러운 삶으로 승화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군들의 군량미 때문에 다 빼앗기고, 솔(松) 껍질이나 이미 추수가 끝나고 알곡은 다 털어간 짚단을 털어서 먹을 것을 찾았다고 하니 가히 그때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제 그런 시절을 넘어왔고, 지금은 그때와 비교해서 먹고사는 일이 걱정이 없으니 얼마나 행복하다고 여기겠는가.
음력 正月 대보름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제2차 대전 중이라 농사지은 곡식은 다 바쳤다. 일본 군인들 군량미로 다 바치고 검불 털어먹고 사는 생활이 너무 비참했다. 그러나 대보름이 되면 찰밥, 오곡밥을 시늉을 내서 만들어 먹었다. 거친 찰밥이라도 맛이 있었다. 오늘 먹는 아침 찰밥은 너무 맛이 좋다. 팥도 많이 들어가고 찹쌀도 순창 쌀이라 찰지고 맛이 있다. 나물도 양념이 흠뻑 들어가 맛이 있다. 사는 생활이 넉넉하여 잘 먹고 산다. 이것이 원 없이 사는 것이다. 만족하게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 정월 대보름날 2012.2.6
아버지는 대보름날 아침에 찰진 찰밥을 드시면서 과거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농사를 지어도 일본군 군량미로 빼앗겨 먹을 것이 없던 시절, 그래도 명절이 돌아오고 대보름이 돌아오면 없는 살림에 찰밥, 오곡밥을 비슷하게 만들어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늉을 내서' 이 몇 마디 단어 속에서 그 가난한 시절, 빼앗긴 세월 속에서도 어김없이 찾아온 대보름의 맛을 느껴 보려고 하셨던 것 같다. 그 어렸을 때 얼마나 배가 고팠고 먹고 싶었을까. 그런데 사실 가난은 불행이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을 겸비하게 만들고 깊은 철학적 사고를 해주게 하는 요인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런 큰 어려움을 겪으면 작은 것들에 대해서도 깊은 감사를 느낀다. 아버지는 극한 가난이라는 언덕을 넘어오시면서 인생에 대해 스스로에게 '왜?'라는 질문을 많이 하셨다. 일기 중간중간에 나타난 독백과도 같은 글을 보면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오묘한 길에 대해 알아보려고 하셨고, 진리가 무엇인지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결국 진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다고 결론을 짓고 있다. 그게 진리는 아니었지만...
진리는 보이지 않는 동굴 속이나 깊고 먼 산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바로 앞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고향 산천을 바라보면서 깊은 사색을 취한 채 세상을 마무리하리라. - 2016.11월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