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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산박 Jul 07. 2022

순창 매운탕집, 메기탕을 잘 먹었다

으스스한 납량(納凉) 재(嶺)를 넘어


우리 가족은 다섯 형제로 아들들이 많았지만, 모두가 객지 생활을 하는 바람에 늘 고향엔 부모님 두 분만 남아 힘든 농사일에 매달리곤 하셨다. 다들 직장이 있어 시골 일을 할 수도 없었고, 한 번씩 휴가철이나 연휴 때 시골에 내려가면, 부모님 일손을 돕는 것보다 그냥 부모님과 한때의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물론, 간단한 밭일이나 소소한 일거리는 아들 며느리들이 오면 함께 할 때도 많았다. 자식들이 시골에 갈 때마다 쌀을 비롯해서 거의 모든 채소류들을 가져갔기 때문에, 부모님은 그것 때문에라도 손수 재배한 것들을 자식들에게 주는 기쁨으로 일에서 떠나시질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해마다 겨울이 돌아오기 전에는 모든 가족이 시골에 모여 김장을 했고, 그 일마저도 부모님이 힘드신 것 같아서 앞으론 절대로 비닐하우스에 배추를 심지 말라고 했는데도 때가 되면 이미 배추가 하우스에 가득 심어져 있었다.      


여느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힘든 농촌 일을 하시면서도 손주들이 내려오는 것을 그렇게 기뻐하셨다. 그래서  커버린 손주들 말고 어린 넷째와 막내 조카들이 자주 시골에 내려가곤 했다. 가족들이  모이면  가는 곳이 있었다. 시골집에서   시간 정도 걸리는 메기매운탕 음식점이었다.  음식점은 작은 강을 끼고 있어 주위 풍광도 좋았는데, 주위엔 허허벌판으로 사실 음식점이 있을 곳은 아니었다. 다만, 유명 맛집이 되다 보니 입소문을 타고 전국에서 모여들어  넓은 흙바닥 주차장이  때마다   있었다. 남원은 추어탕으로 유명하지만, 음식점에서  먹는 것보다 직접 만들어 먹는 맛이  있어서 추어탕집은 외지인들이 자주 찾았고, 현지인들은 오히려 추어탕보다 강가에 있는 이런 매운탕집을  찾았다. 메기매운탕 맛은 서울에 있는 맛집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였는데, 아마도 멋진 주변 경치와 사람 구경 때문에  맛이  배가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도 든다.           



서울에서  식구가 출동하여 내려왔다. 어젯밤에 오고 오늘 11시까지 모두 모였다. 순창 ㅇㅇ 매운탕집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작정을 했다. 부산 사는 아들 식구는 12 가까이에 닥쳤다. 적성 매운탕집으로 직행, 순식간에 도착했다. 평소보다 2-3배가 넘게 손님이 많았고, 승용차를 세울만한 곳이 없었다. 홀비가 만원이다. 우리는 장정이 9, 애들이 6  15명인데 메기탕을  셋으로 주문했다. 자리가 단칸으로 우리 식구들이  맞게 차지했다. 날씨가 기온이 높아 여름날을 방불케 .   3, 공기밥 12, 막걸리 1, 맛있게  먹었다. - 메기탕을  먹었다 (2016.5.5. 어린이날 연휴)     


어린이날, 어버이날 양일을 기하여 내려온 子와 孫, 子婦들이 다 떠났다. 시끌벅적한 집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잘 먹고 잘 놀았다. 손주들하고 애비들과 며느리들과 한자리에서 밥 먹는 것도 재미가 있다. 반찬도 걸고 밥도 맛있었다. 어수선한 안방에 부산에 사는 아들이 문갑을 들여놔 방안이 깨끗이 정돈되어 보기도 좋고 기분도 좋다. 순창 적성 ㅇㅇ 매운탕 집에서 다섯 식구 15명이 모두 한자리에서 밥 먹는 것도 기분 좋았다. 오후에 써레질하려고 오전에 애들하고 트랙터에 써레를 장착해 놨는데 오전에 써레질 다 끝냈다. 애들 다 가고 오후엔 수박 3번 동 순을 땄다. 벌통을 옮겼다. - 애들이 떠난 후 (2016.5.6.)          



발전소에 근무할  전체 식구들 22명을 초대한 적이 있었다. 조용히 혼자 사는 사택에서 이틀을 보내면서 북적거리면서 보내다, 돌아가는 시간이 다가오고 모두가 썰물처럼 빠져나갔을 때의 혼자 남은  진한 외로움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바로 그것은 경험한 자만이 아는 이상한 외로움이었다. 그래서 사람은 서로 다투면서도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 떠났다 표현에서도 그것을 느낀다. 그것은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이상한 외로움으로 느껴졌다. 함께 살아가야 하고 함께 부딪치며 살아가야 하는 가족인데, 이처럼 왔다가 떠나는 인생살이를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가 싶기도 해서 씁쓸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계시는 지금, 시간을 일부러 내어서 다섯 아들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어머니 심심치 않게 시골에 내려간다. 어머니에게 얼마나 즐거운 일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냥 그것이 서로의 외로운 마음을 달래줄  있는 아직은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순창 고추장으로 유명한  지역은 사실 할머니의 고향이었다. 아버지가  매운탕집에 자주 가고 싶어 하신 이유는 사연이 있었다. 바로 어렸을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외가를 찾아가셨다고 했는데,  추억의 조각을 하나씩 찾고 싶으셨던 것이었다. 자동차로 재를 넘으면 바로 그때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납량특집이었다.


외가에 가기 위해 시골집에서 오후에 동생과 둘이 나서면, 저녁 어스름이     중턱에 도착한다고 한. 산이 높아 해가 일찍 지면, 주위가 어둑해지고 여우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고 한다. 당시 어린 마음에 동생과 함께  고개를 넘을  머리가 쭈뼛거렸고 너무 긴장한 나머지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고 한다. 그냥 고개를 넘어가면 되는데 동생이 헛것을 봤는지 언덕 너머에 뭔가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보인다고 했고, 그때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하면서  번을 가다가 주저앉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문(呪文) 외웠는데,  일곱 글자로  한자(漢字) 주문을 앞으로  , 뒤로   그렇게 일곱  외우면 마음이 담대해졌다고 한다.   


사실,  이야기는 아버지로부터 수없이 들었고, 특히 성경과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 아버지의 그때 주문을 외웠던 경험이 일종의 믿음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믿음에 대해  아신다고 생각하셨다. 지겹도록 들었던  주문에 대한 이야기를 점심 먹으러 아버지의 어렸을  추억의 납량(納凉) 재를 넘으면서 또다시 들어야 했다.


“여기가 바로 그 자리다.”

“아버지, 오늘로 백번에 가까워졌네요. 어쨌든 어린 시절에는 여기가 정말 무섭긴 했겠어요.”

“무섭다마다, 이상하게 낮에도 무서웠어. 사람들이 없었고, 산이라서 빨리 어두워졌는데 어두울 때 이곳을 지나면 저 높은 나무 위에 앉아 우리를 쳐다보고 있던 귀신들이 쫓아올 것 같아 동생하고 얼마나 뛰었는지 외갓집에 도착했을 때는 땀이 범벅이 됐다니까.”

“돌아갈 때는요?”

“지금도 우습지만, 외갓집에 가서 놀아도 돌아갈 일이 걱정이 되었는지, 동생이 빨리 가자고 하면 잊어버리고 있다가 그때부터 무서운 생각이 올라왔어. 지금은 별것도 아닌데...”

“맞아요. 저도 어릴 적 그런 장소가 있었어요. 지금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온 가족들이 모여 자주 갔던 매운탕집은 지나간 아버지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다시 건져 올려 재미있는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던 시간이었고, 또 다른 추억을 우리에게 남긴 장소가 되었다. 이제는 다시 들을 수 없는 아버지의 납량특집. 황혼의 시절을 보내시면서 아버지는 그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가져오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 매운탕집은 우리에게 맛보다도 진한 추억을 더 만들어 주었던 곳이 되었고, 이제는 그곳이 아버지의 추억을 넘어 우리에게 새롭게 유전된 아련한 또 다른 추억을 만든 장소이기도 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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