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호주 축구 결승을 보고
아버지는 운동 경기 중에서 딱 하나, 축구를 좋아하셨다. 정부에서 노인 일자리 창출을 위한 방안으로 한궁(韓弓)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우연히 그것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위촉받으신 적이 있었다. 사실 같은 노인들에게 한궁을 가르치시긴 했지만, 그것을 잘해서가 아니라 어르신들에게 일부 배당이 되어서 가르치신 것 같다. 그것 말고 운동은 축구경기를 그렇게 좋아하셨다. 물론 연세가 많아 운동 자체는 하지 못하지만, TV에서 중계하는 국가대표 축구경기는 빠짐없이 보셨다고 한다. 2002년 월드컵 4강 때는 밥을 안 먹어도 살 것 같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 그만큼 모든 국민이 즐거웠던 추억이 있는 경기였고, 아버지는 그때가 인생 최고의 날들이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때의 일기는 찾을 수 없지만, 이후 자주 축구경기를 보시고 글을 남기신 것 같다.
우리 대한민국과 호주의 아세안 축구 결승전이 있는 날이다. 4강전은 1:0으로 이겼다. 이제 우승컵을 소유할 수 있지 않겠는가. 50% 예상을 갖고 있었다. 오늘 31일 결승전을 기다렸다. 오후 5:40 시작했는데 6:10분에 킥이 되었다. 전반 27분께 실점이 되었다. 너무 아쉽다. 그러나 후반전이 남았다. 하지만 후반 45분이 되어도 득점이 없다. 실망이 커졌다. 추가시간 3분이 주어졌다. 그때 이정협의 패스가 우측에 골키퍼와 맞서다 손흥민 마침내 골을 덮치기 직전 툭 차는 찰나 골문에 꽂혔다. 그야말로 가슴이 뛰면서 울컥하는 기분과 목소리 터지게 고함을 쳤다. 늙은 팔십이 넘는 나이에 열 살 어린애가 되었다.
연장전에서 말도 아닌 골문 옆에서 골이 나왔다. 한 사람은 누워서 한 사람은 서서 방위했다. 그런데 두 사람을 따돌리고 빗살로 찬 것을 골키퍼가 쳐냈는데, 다시 적병에 걸려 실점이 되었다. 부풀었던 신기한 호기심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코너킥을 안 주려고 골을 가지고 실랑이를 한 것이 문제였다. 그렇게 판단이 부족해서 되겠는가. 코너킥이 그렇게 무서웠다. 참으로 아쉽고 들뜬 호기심이 한순간 무너져 실망스러운 감을 진정키가 어려웠다. - 아시아 축구 결승 대한민국-호주전을 보고 (2015.1.31.)
누구나 축구를 좋아한다.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가 축구를 좋아하시는지 잘 알았지만 이렇게 일기로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표현이 재미있다. 막는다는 표현을 방위한다, 상대편 선수를 적으로, 적병으로 묘사했다. 먼저 한 골을 먹고 첫 번째 우리 골이 터졌을 때 모습을 자세히 묘사한 것이 재밌다. 중계방송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팔십이 넘는 나이에 어린애가 되는 심정, 모두가 그 심정을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그리고 연장전에 다시 한 골을 먹고 실망하는 모습도 여느 젊은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그 실망감을 일기에 남겼다.
어제 결승전 축구가 사람을 허탈 상태로 만들었다. 오늘도 그 실망감을 지울 수 없다. (2015.2.1)
어렸을 때 우리 동네는 30가구쯤 되었고 흑백텔레비전을 갖고 있는 집이 딱 하나였다. 그 집을 우리는 대문집이라 불렀다. 동네에서 가장 잘 사는 집으로 머슴을 두고 있었고, 들어가는 대문은 어린 우리가 쳐다보기에는 엄청 높았다. 아이들이 저녁만 되면 텔레비전이 신기해서 그 집으로 모여들자 그 집에서 돈을 받기 시작했다. 돈이 없던 우리들은 닫힌 대문 앞에서 문틈으로 저 멀리 마루에 올려진 조그만 텔레비전을 쳐다보곤 했다.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도 서로 보려고 올챙이들 흐르는 물 앞에 모인 것처럼 떼거지로 문 앞에 달라붙었다. 일곱 살에 세상을 떠난 동생이 그 집 앞에서 돈 없다고 텔레비전을 안 보여 주느냐고 발로 대문을 찼던 기억. 녀석이 여섯 살쯤 되던 해였다.
한 번은 아버지의 일기처럼 그때도 호주와의 축구경기였는데 4-1로 지다가 후반전 경기 5분을 남겨놓고 3점을 내리 득점해서 4-4로 동점을 만든 기적 같은 경기를 보게 되었다. 마침 그 경기는 그 대문집에서 돈을 받지 않고 동네 사람 모두를 볼 수 있도록 허락했기에 마당에 사람들이 가득 찼고, 그날은 가슴 졸이다가 결국 동점이 되는 바람에 동네가 떠나갈 듯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후반전 5분 남겨놓고 세 골을 넣었으니 그도 그럴 만했다.
가진 것이 별로 없던 그때 그 시절, 당시 작은 시골 마을에서 유일한 낙이라면 동네에서 딱 하나 있는 그 대문집 텔레비전을 보는 일이었고, 그것도 돈을 내고 봐야 했으니 정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가끔 공짜로 보여 줄 때 주인 할아버지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12시가 넘어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고 나온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 대문집은 지금은 리모델링해서 작은 기와집이 되었고, 자식들이 서울에서 가끔 내려와 잠시 머무는 전원주택이 되었다. 사람이 없어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다 보니 마당은 풀로 가득 차 있고, 그 옛날의 영화는 꿈속의 이야기처럼 우리들의 가슴에만 아련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