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로(村老)의 일기
해마다 정초가 되면 아버지는 내게 회사에서 나오는 수첩을 하나 더 얻을 수 없냐고 하셨다. 농부의 일기. 그 바쁘고 힘든 농사일 와중에 어떻게 일기를 쓰실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어떤 날은 몇 장씩 또 어떤 날은 한두 줄이라도 빼먹지 않고 매일의 삶을 가감 없이 기록하신 귀중한 인생 노트였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께 자주 내려가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가끔은 내려갔기 때문에 그래서 나름 아버지를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빛바랜 아버지의 일기를 읽다 보니 정말 아버지를 하나도 모르는 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았다.
깊게 파인 볼펜 자국이 더욱 슬퍼 보이는 일기는 바쁘고 지난(至難)한 농촌의 일상이 구슬진 땀방울로 기록된 질고와 안식의 페이지들이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이 작은 일기장 앞에 앉았을 때가 가장 순수하고 평안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 수첩은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힘든 삶을 오롯이 받아주는 친구요 안식처 아니었을까. 그때야 비로소 낡아 온몸을 아버지께 드린,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다 받아낸 수첩이 사람보다 귀하다는 생각을 처음 해보았다.
연휴가 되어 아들들이 모두 왔다. 손주 놈들이 키가 이제 훤칠하다. 반찬이 많아졌고 밥도 국도 맛이 있다. 아들 손자 등이 어울려 먹는 모양이 재미가 있다. 그야말로 조용하던 집이 갑자기 떠들썩하고 시끄럽다. 손자들의 소리가 굿 들어온 장구소리, 꽹과리 소리 같다. 집안이 요란스럽고 북새통이 됐다. 시끄러운 것도 싫지 않다. - 아들 손자들이 왔다. (2017.5.3 사월 초파일, 춘향제)
내게 아버지는 준엄함 그 자체였다. 아들을 대하시는 아버지와 손주를 대하시는 아버지는 전혀 딴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다른 창고에 숨어 있던 웃음을 손주들이 기막히게 몽땅 데려왔던 그때, 그 모습은 내게 너무 낯설었다. 자식들이 한 번씩 내려갈 때 손주 보실 반가움에 무장해제된 어찌할 수 없는 마음. 그 기다림과 설렘이 팔순의 연약한 행간에서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거기에 연세가 들어감에 따라 이제 작별해야 할 고향 산천에 대한 그리운 정도 가감 없이 표현하셨다.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아들 식구들에 대한 하나하나의 심경도 가끔 나타내셔서, 때로는 그리움으로 때로는 안타까움으로 내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팔십을 넘게 흙과 함께 살아오신 이 땅에서 아버지는 여느 부모님과 다를 바 없는 '사랑' 그 자체였다.
"ㅇㅇ가 대표로 애비 생신을 축하하기 위하여 식구들을 데리고 내려오겠다고 해서 극구 만류했지만 그래도 눈길이 이곳은 정상적이라고 해서 온다고 한다. 저녁에 동생이 와서 아들 식구가 온다고 했더니 이 빙판 눈길이 얼마나 위험한데 오라고 했냐고 화를 낸다. 전화해 보니 천안이라 눈길이 위험하니 되돌아가라고 했는데 기어이 온단다. 할 수 없이 시간마다 전화를 했는데 순식간에 익산에 왔다고 한다. 거기서부터는 눈길이 위험하니 조심히 오라고 했다. 1시간 후 확인해 보니 오수 왔다고 한다. 약 40분이 지나서 옥상 슬라브에 올라가 어디쯤 오는지 쳐다보고 있는데 '할아버지!' 하며 손주 놈이 들어온다. '아이구 왔구나' 하며 안심이 되었다."
- '손주 놈이 오다' 2018.1월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아버지는 이생에서 삶의 끝이 다가옴을 느끼셨는지 자주 이런 글을 남기셨다. 팔십 평생 살아오신 고향 땅에 대한 애착과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인생의 허무함을 서정적인 시처럼 묘사하여 혼자서 그것들을 달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저 어린아이와 같은 작은 존재였고 해지기 전 저녁 어스름처럼 다가오는 '숙명의 그림자'를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만 하는 약한 사람이었다.
"언젠가는 나도 가야지 내 고향 땅 장포리, 그 정든 마을 어머님 곁으로
꿈에도 못 잊을 어릴 적 놀던 그곳, 그 양지바른 곳에 나도 쉬련다.
인생이 허무하고 고생스러웠던 그 모든 것 베개 삼고 나도 쉬련다.
아이들이 불러주는 풀피리 소리나 들으며, 아침 동터올 때 꿩 소리나 벗하여
어머니 보금자리 고향의 꽃동산에..."
- 일시 미상, '내 쉴 곳'
아쉬움. 그것은 우리에게 빚으로 남게 한 독백이었다. 사람이 왔던 데로 다시 가는 것을 '돌아가신다'라고 말한다. 본향(本鄕)으로 가야 하는 그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가장 순수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 것 같다. 바로 신(神)이 인간의 마음에 몰래 내장한 DNA 때문일까. 아들들은 아버지가 연세가 많아지자 가끔은 임종의 순간을 생각해보았다.
사람이 병들면 어쩔 수 없이 누구를 막론하고 가야 하는 길인데, 그 길을 평안하고 행복하게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자녀들이라면 더하지 않겠는가. 늘 죽음이라는 불청객은 우리 가까이에서 복병처럼 숨어 있었지만 우린 남의 일처럼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우리 가까이에 다가온다면, 아니 당장 연세가 많은 아버지에게 다가온다면 마지막 호흡이 다하기 전까지 모든 식구들이 모여 세상에서 만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했다고 그렇게 전하고 싶었다. 그 가시는 길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꽃길을 만들어 드리고, 거룩한 찬송을 불러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어쩌면 모두가 바라는 희망 사항을 외면한 채 이승의 언덕을 가로지르게 했다.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저 그것을 요구할 순 있었지만, 마음 한 편의 바람이었을 뿐, 그런 행운이 찾아올 것이라고는 100%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현재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바람은 산 자들을 위한 욕심일지도 모른다.
생과 사를 가르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순례를 끝내는 한 고독한 영혼은 어떤 마음의 상태일까. 또 얼마나 외로울까. 그것을 전혀 가늠하지 못하는 우리 남은 자들의 울림이 순례자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얼마 전 가족처럼 사랑하는 강아지 마지막 가는 길에서 그것을 애끓게 느꼈다.
아버지의 농부 일기.
그것은 농부 일기가 아니었다. 농촌일기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인생 일기라고 딱 잘라 말하기에도 좀 어색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닌 수첩에게 토해낸 아버지의 고해성사였다. 그것은 아버지의 연륜처럼 낡아 친구처럼 여긴 수첩만 알아야 할 비밀이기도 했다. 그 비밀은 예전의 아버지에게서 찾을 수 없는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고, 빛바랜 추억이 음각(陰刻)되어 진하게 박혀 있는 순례자의 노래였다.
바로 아버지의 수첩은 매일 세상이 주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던 오직 아버지만이 쉬실 수 있는 공간이자 마음의 휴식처였다. 그와 대화가 끝나야 편히 주무실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말동무였다. 또한, 그곳은 아들에게 쏟아낼 수 없는 아버지만이 고이 간직하고 싶은 이야기들로 가득한 보물 창고요 시크릿 가든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매일 밤마다 조용히 그곳의 문을 여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