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산박 Aug 25. 2022

참 오늘은 별 일을 다 겪는다.

일이 세트로 꼬일 때가 있다.


살다 보면 무슨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일이 겹겹이 꼬일 때가 있다. 전철 게이트 앞에까지 갔는데 지갑을 집에 놓고 왔을 때, 날씨를 보니 비가 안 올 것 같아 우산을 챙기지 않았는데 도착역에서 비가 주룩주룩 내릴 때, 주유 계기판 화살표가 빨간 눈금에 가 있는데 주유소는 보이지 않고 도로가 산골로 접어들 때, 참 이런 때는 또 이상하게 여러 일들이 함께 꼬여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미리 꼼꼼하게 체크하지 못한 잘못이 무엇보다 크다. 어떻게 보면 그만큼 작은 일에 소홀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 번은 제주 출장 중 제주시에 사는 외삼촌 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제주에 갈 때마다 꼭 한번 찾아봐야지 하면서도 약속된 다른 일정이 있어서 늘 그냥 지나쳤는데 그날은 다른 약속을 보류하고 외삼촌 댁에 가기로 한 것이었다. 그날따라 비바람이 몹시 심했다. 일기가 안 좋아 갈까 말까 고민하다 간다고 말은 했기 때문에 약속을 지켜야 했다. 우산은 이미 거센 바람 때문에 꺾여 고장이 났고 택시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았다. 겨우 나타난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외삼촌 댁 아파트 이름을 댔다. 택시 기사는 가는 내내 정치가 어떻고 나라가 어떻고 갈라진 테너 목소리로 일장 연설을 중얼중얼 해댔다. 한참 동안 혼자 막 떠들더니 다 왔다고 어느 아파트 앞에 내려줬다.



근처 가게에서 과일 한 박스를 산 후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하필이면 외삼촌 댁은 입구에서 가장 먼 아파트 끝이었다. 비바람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겨우 끝에 다다랐다. 도착해 호수를 확인해 보니 엘리베이터도 없는데 4층 끝 층이었다. 힘들게 올라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그런데, 잠시 후 문을 연 아주머니는 외숙모가 아니었다. 놀라서 동 호수를 물었더니 호수는 맞는데 아파트를 잘못 찾아온 것이라고 했다. 아파트 이름을 대며 이 아파트가 아니냐고 했더니 건너편 아파트라 한참 나가야 한다고 했다. 택시 기사가 잘못 내려준 것이라고 했다. 죄송하다고 인사하고는 다시 과일 박스를 들고 비바람을 헤치며 겨우 건너편 아파트로 갔다. 비바람이 치는데 짜증도 나고 땀도 나고 화도 났다.



겨우 외삼촌 댁에 도착했다. 사실 아무 생각 없이 두 분만 계신 줄 알았기에 편안하게 갔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결혼한 아들과 손주 둘이 와 있었다. 내가 간다고 해서 불렀다는 것이었다. 미리 좀 알려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산다고 했다. 나로서는 이종사촌 동생이었고 처음 보는 조카들이었다. 난 그들이 서울 사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들을 보자 반가운 것도 잠시 갑자기 지갑을 확인하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대개 카드를 주로 사용하기에 현금을 거의 갖고 다니지 않아서 약간 걱정이 되었는데 확인해 보니 지갑엔 현금이 종류별로 섞여 있었다. 그것도 몇 장밖에 없었다. 난감해서 아파트 부근에 ATM기가 없냐고 물었더니 오래된 아파트라 없다고 했다. 조카들에게 줄 용돈 정도는 되었지만 같은 돈을 주면서도 얼굴이 다른 돈을 볼품없이 섞어서 줘야만 했다. 얼굴은 다르지만 가치는 같다고 둘러대며 위기를 넘겨야 했다.



아래 아버지 일기를 보니 그때가 생각났다. 일이 안 풀릴 때는 세트메뉴처럼 한꺼번에 중첩이 되며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지나고 나면 웃고 넘어갈 수 있지만, 당시는 세상 살기 싫을 정도로 자신이 미웠는데 아버지는 어떠셨을까.



석양에 눈발이 날린다. 다시 추워진다고 하는데 정말 오늘은 춥다. 차단기가 고장 났다. 하우스 수막이 안 되겠다. 날이 어두워진다. 오토바이를 꺼냈다. 기름 한 병을 넣고 달렸다. 가다가 굴다리에서 갑자기 오토바이가 시동이 꺼졌다. 연료계통이 막힌 모양이다. 이리저리 몇 번을 시도해 봐도 시동이 안 걸린다. 그것을 끌고 ㅇㅇ네 집에까지 갔다. 누전차단기 고장이 났는데 오토바이까지 말썽이라고 같이 금지 철물점까지 차 좀 가지고 가자고 했다. 그런데 함께 가보니 철물점이 닫혀 있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다. 하는 수없이 집으로 겨우 돌아와 ㅇㅇ한테 전화했다. 미안하지만 남원 시내로 함께 좀 가자고 했다. 같이 시내로 갔다. 그런데 거기도 철물점이 닫혀 있었다. 오늘 정말 재수가 없는 모양이다. 꼭 사 와야 해서 문 앞에 적혀있는 전화로 주인 불러내 가까스로 차단기를 샀다. 참 오늘 별일을 다 겪는다. - 참 오늘 별일을 다 겪는다. 2016.2.14



아버지는 그날 되는 일이 없는 날이었다. 사람이 이쯤 되면 차단기고 뭐고 나자빠질 수도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겨울철에 비닐하우스 수막을 못하면 보온이 안돼 안에 있는 작물이 다 얼어버리기 때문에 어떻게든 차단기를 고쳐야 했을 것이다. 일이 쉽게 풀리려면 오토바이가 고장 나지 않아야 했고 가까운 철물점도 문이 열려 있어야 했다. 그러면 간단한 일이었다. 또 평소에는 항상 그랬었다. 그런데 한번 일이 꼬이니 계속 별일이 생겼던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 속마음은 알 수 없지만, 일기에는 별일 정도로 무겁지 않게 기록하신 것을 보면 그런 일들은 평소에도 심심찮게 있었던 일이 아니었을까 짐작을 해본다.



아버지 일기를 펴놓고 그 일기가 눈앞에 계신 아버지처럼 느껴져 자꾸 말을 걸었다. ‘아니 누전차단기를 몇 개 스페어로 좀 미리 사놓으시던지, 오토바이를 가끔 수리센터에 맡겨 문제없도록 점검을 받아 놓으시던지 하시지 그 무슨 고생을 그렇게 하셨어요? 같이 철물점 가자고 했던 동네 사람들한테는 고맙다는 말씀은 하신 거예요? 아버지 성격에 당연히 같이 가주는 걸로 생각하시고 모른 척하신 것 아니세요?’

일기장에 대고 아버지께 큰소리를 해댔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아버지가 조용히 말씀을 하셨다.

‘나는 사람들에게 어디 가자고 하면 누구든지 도와주려고 싫은 기색 없이 따라나서는데 그럼 너는 네게 그렇게 해 줄 사람이라도 있느냐?’

‘………….’








이전 11화 속눈물을 닦아드려 보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