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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산박 Jul 18. 2022

속눈물을 닦아드려 보라

그것은 운명(運命)


노동의 굴레. 그것은 아버지에게 숙명이었다. 떠날 수 없는 족쇄와도 같았던 농촌의 일.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몸에 자연스럽게 내장된 프로그램처럼 날이 밝으면 들판에 나가야 하고, 저녁 어스름이 져야 집으로 돌아오는 힘든 일상이었다. 그것은 단지 아버지만의 힘든 일상이 아니었다. 가난한 집안으로 시집와서 한평생을 연약한 몸으로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해야 했던 어머니에게도 다름없는 일상이었다. 더구나 어머니는 일을 마치시고 다시 집에 와서 음식 준비를 해야 하는 이중고의 삶을 사실 수밖에 없었다. 이에 아들들은 끊임없이 이제 그만 일을 놓으라고 노래를 불렀다. 젊은 사람도 감당하기 힘든 농사일인데, 팔십이 된 노인이 무리한 노동을 한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에는 분명히 농사일을 접겠다던 아버지가 가을 추석 때 들판에 잔뜩 일을 남겨 놓고 아들들의 성화가 일자 농촌에서 일을 하지 않으면 빨리 죽을 것이라는 위협으로 대항하며 그때마다 잠시의 위기를 넘겼다.



갑오(甲午)년이 밝았다. 다름없이 동쪽 저 먼 산에 해가 떴다. 구름은 엷게 덮였지만 그리 춥지 않은 날이다. 금년의 건강은 위장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하느냐이다. 소화기능이 약해지는 감이 있다. 식후에 은근히 위의 중압감이 오며 쾌치 못함을 느낀다. 위내시경을 해야겠다. 자식들은 이제 부디 농사일을 놓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로 늙은 사람들은 어렵다. 일과 더불어 생활이 된 사람이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사는 재미가 없다. 일을 놓고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생각이 든다. 일이 벗이다. 일을 함으로써 마음이 편하니 좀처럼 놓지 못하겠다. 때로는 일에 지쳐서 몸이 피곤할 때는 금방이라도 훨훨 털어버리고 싶을 때가 많았다. 금년 한 해만 농사지으면 더 할 수 없을 것 같다. 금년으로 해서 마감을 할 생각이다. 금년 노동이 끝나면 몸의 기력이 더 할 수도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일과 더불어 사는 것이나, 일을 놓아버리고 한가로이 사는 것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을 것 같다. 쉬어가면서 한 해만 노동을 하자 - 그래, 한 해만 더 노동을 하자 2014.1.1   



새해 아침의 아버지 다짐은 매년 같았다.

결국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까지 일을 하셨으니 일기 속 다짐처럼 금년까지만 한다고 하시고선 3년을 더 하신 것이었다. ‘일이 벗이다, 일을 함으로써 마음이 편하다’라는 생각이 꽉 차 있으니 아들들의 성화가 어떻게 먹혀 들어가겠는가. 그래서 아들들이 제안을 했다. 일을 완전히 놓지 못하시겠다면 좀 범위를 줄이자, 집 앞에 있는 논 하나만 짓고 나머지는 동네 젊은 사람들한테 넘기라고 했다. 젊은 사람들이라고 해 봐야 칠십이 다 된 사람들이지만. 아버지는 내 논밭을 차라리 다 팔아버리면 몰라도 뻔히 살아 있으면서 남이 내 마당에 들어와 농사짓는 것은 도저히 못 볼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이른바 죽기 전까지 일에서 손을 떼지 못할 것이라는 외침이었고 결국 그대로 되었다.



정신력이 약하다. 제대로가 아니다. 엉뚱한 일을 한다. 치매가 무섭다. 정신을 바짝 차린다는 말이 있다. 차려봐야 마찬가지다. 그냥 망각한다. 정신수양이 제일인 것 같다. 내 정신을 잃고도 남을 지경이다. 

- 정신이 왔다 갔다 한다. 2014.3.6

일하기가 싫다. 비닐하우스 안에 수막 호스를 점검하고 비닐 터진 것 가려야 하고 할 일이 많은데, 웬일인지 기동하기가 싫다. 친구와 곡성에 가서 점심 먹고 들어와 방 안에서 TV만 시청했다. 일어서기가 귀찮다. 이젠 그야말로 사족을 못쓰는 극 노인인가 싶고 참으로 한심스럽다. 제 몸 제 맘대로 못하는 상 노인인가 보다. 몸이 일찍 병고로 쇠약해졌다. 비닐하우스 손보기가 심란하여 오후에는 누워서 TV 시청하고 말았다.

 - 움직이기 싫은 날 2016.11.22

배추 절이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배추 한 포기를 반으로 잘라 소금물에 담가 건져서 소금을 다시 뿌려 600L 통에 담그고 포기 포기에 소금을 뿌려 하룻밤을 재워야 한다. 다음에는 건져서 물통에 물을 자주 갈아가면서 깨끗하게 씻는다. 이것을 건져서 물을 다 뺀다. 이 작업도 보통 일이 아니다. 오늘 애들이 김장하러 온다. - 김장하는 날 2016.12.2

딸기 모종 이것도 역시 보통이 아니다. 남보기는 쉬운데 몸이 무겁고 기력이 소진하여 모든 일이 번거롭고 힘이 든다. - 어느 일이나 쉬운 일이 없다. 2017.4.12



논밭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남에게 임대해 주고 소일거리로 밭작물이나 해도 사시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데 왜 사서 그렇게 고생하셨나 싶다. 이유는 하나, 내 논밭을 다른 사람이 경작하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고, 그래도 아직은 움직일 수 있어 힘들기는 하지만 일하는데 지장이 없으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일기 곳곳에는 몸도 마음도 힘들다는 한탄을 그렇게 남기셨다. 미리 일기를 훔쳐서라도 봤더라면 아들들이 난리치고 일방적으로 정리를 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운명(運命)

그것은 운명이었다. 농촌에서 자라 흙을 밟고 살아야 마음이 편했던 삶. 일을 떠나 산다는 그것은 사치라는 생각과 그래서 여러 가지 생각이 올라와도 결국 정답은 농촌의 일이었고, 그것은 모든 생각의 귀결점이었다. 아들들이 도회지로 공부를 하러 나가 처음 자취를 했을 때, 당시 아버지는 처음으로 대도시로 이사할까 고민했다고 후에 말씀하셨다. 수년이 지나고 나서 그때 그런 결정을 했다면, 농촌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중요한 순간에 결단을 하지 못하고 말로만 그렇게 할 것 같으면 누가 그런 말을 못 하냐고 했다. 물론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농촌의 삶은 아버지의 운명이라고 했다. 한편, 일기 곳곳에서 힘들긴 하지만 농촌의 삶이 행복하다는 언급을 수없이 하신 걸로 봐서, 아버지는 정말로 농촌을 떠날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나신 것 같았다.



농촌에 계신 수많은 우리의 아버지들. 도시에 살지만 일에 매여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의 아버지들. 자식들이 있다면 가서 마음을 끄집어내고 눈 맞추며 진솔하게 이야기를 해 보라. 그리고 살아계실 때 조금이라도 그 얼굴에서 웃음이 올라오도록 귀찮게라도 다가가라. 몸이 거부하고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않더라도 뒤돌아보지 말고 무턱대고 아버지를 안아보라. 겉은 땀이지만 그 마음속에 피같이 진한 눈물이 흐른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 속눈물을 닦아드려 보라.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우리의 아버지들. 이 땅에 그런 아버지들이 너무나 많이 살고 계시다. 이제는 자식들이 이유 불문하고 가까이 다가가야 할 때다. 그것을 하지 못해서 한이 섞인 부탁처럼 드리는 하소연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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