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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산박 Jul 08. 2022

대관절 이 병이 무슨 병이요?

어머니의 쯔쯔가무시 병


아버지의 일기를 보며 오늘도 깊은 회한에 잠긴다.

볼펜 자국이 깊이 들어가 꾹꾹 눌러쓰신 글자엔 농촌의 삶 속에서 맞닥뜨린 고통과 슬픔 그리고 아픔이 그 행간에 묻어 있었다. 왜, 일찍 이 일기를 훔쳐서라도 보지 않았던가. 시골에 내려가면 안방 아버지 책상 위 책꽂이에 늘 꽂혀 있었는데. 그것을 한 번이라도 보려고 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 농촌의 지난한 삶과 아버지에 대한 깊은 관심 부재가 아니었나 싶어 자책감이 올라온다. 그저 아버지를 만나면 대화를 통해 깊은 마음 속 우물을 길어 올리려고만 했을 뿐, 이렇게 자세하게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한 마음의 편지가 있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일기 속 아버지는 당신의 마음을 겉으로 잘 표현하지 않으셨고, 그 답답함과 한스러움을 일기에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아는 아버지의 참모습이 아니었다. 아버지 또한 당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아들들에게 다 내어놓지 않았던 책임도 있음을. 아버지에게 따지고 싶다. 하지만 이제는 지나간 일이 되어 원망 아닌 원망이 한숨이 되어 허공을 가른다.      


일기를 읽다가 과거의 사건들과 다시 만나면서 퍼즐이 하나씩 맞춰져 가는 것 같다. 부모님은 늘 자식들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식들에게 당신의 어렵고 힘든 마음이나 사건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이유 때문이었다. 모든 부모의 마음이리라. 아버지는 그것을 알지 못했을까. 언젠가는 알게 되는 날이 오고 그때는 더욱 서로가 힘들다는 것을. 당신이 더욱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부모로서 도리라고 생각했을까. 왜 그 짐을 많은 아들들과 공유하지 못했을까. 왜 그 짐을 자신을 창조하신 분에게 맡기지 못하고 혼자서 괴로워했을까. 다른 무엇보다도 나는 그것이 더 안타깝다. 언젠가 어머니가 무슨 풀밭에서 진드기에 물렸는데 큰 문제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당시 그 병이 유행처럼 돌아 뉴스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였던 것 같다.


      

오늘은 날씨가 비 내린 끝이라 바람이 강하여 기온이 급감되었다. 안사람은 쯔쯔가무시 진드기 병에 걸려 밤잠을 자고 난 뒤에 얼굴이 퉁퉁 부었다. 서ㅇㅇ내과에 갔다. 추운데 기다리기 지루해서 11:40 차로 갔다. 1시부터 점심시간인데 빠듯했다. 점심시간이 닥쳤다. 내가 나서서 물었다. 대관절 이 병이 무엇이요? 무슨 병이냐고 다잡아 물었다. 쯔쯔가무시 병이란다. 그런데 왜 쥐병이라고 했냐고 되물었다. 유행성 출혈열이나 다같이 들에서 옮아 오게 된 쥐병이란다. - 대관절 이 병이 무슨 병이요? 2013.12.11.          



장남으로서 연세가 많은 부모님과 함께 살지 못하고 농촌에 방치한 것 같아 너무나도 죄를 지은 것 같고, 황혼의 부모님을 제대로 봉양하지 못한 결과가 고통으로 나타난 것을 보면서, 가슴이 아프고 죄송스러운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 물론, 이제 일 좀 그만하자고 말씀을 안 드린 것이 아니었다. 시골집에 갈 때마다 밥 먹듯이 여러 번 얘기는 했지만, 팔십 평생 흙을 밟은 사람이 농촌을 떠나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큰소리만 치셨다. 그런 말씀을 하실 때는 언제고, 아버지의 일기를 보니 자식들에게 말씀한 것과 너무도 다르게 평생 일에서 벗어나지 못한 회한을 수첩에 한풀이하듯 쏟아내신 것 같아 화가 난다. 여느 부모가 그렇듯 속에 있는 마음을 표출하지 않는 이유가 혼자서 그 고통을 감내하고 자식들에게 전가하고 싶지 않아서일 터다. 몸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없는 부모. 왜, 우리들의 부모는 그래야만 했을까. 이번에 시골 내려갔을 때 어머님께 말씀드렸다. 조금이라도 몸에 이상이 온다고 느껴지면 무조건 미미한 아픔이라도 전화해서 아프다고 말씀하시라고.        



기침 때문에 누워버렸다. 감기약을 지어다 먹었는데도 기침이 더 심하다. 보통 감기가 아니다. 입맛이 떨어져 음식 섭취가 안 되니 더 쇠약해졌다. - 심한 감기가 들다 2013.6.1


도라지를 먹으며 감기와 겨루고 있다. 엊저녁 기침을 하고 콧물이 나며 머리도 아팠다. 생도라지를 잘게 잘라 입에 넣고 오래오래 씹어 침에 녹은 즙을 마시며 그 찌꺼기를 쿠쿠로 끓여 마셨다. 두꺼운 이불을 덮고 땀을 쭉 내면서 잤다. 오늘도 식후마다 먹었다. 감기 기가 꺾인 것 같다.

- 도라지를 씹어 감기 기를 꺾었다 2013.12.6            



수첩이 뭐 아들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수첩에겐 그 아픔과 고통을 낱낱이 고하면서도 자식들에게는 언제나 괜찮은 일로 넘겼다. 사실 나도 그렇지만 나는 그런 부모가 싫다. 아프면 아프다고 하고 힘들면 힘들다고 하는 것이 전통적으로 우리 정서에 맞지 않은지 몰라도, 최소한 부모와 자식 간에는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해본다. 도시와 달라 약을 지으러 가는 것도 멀리 시내로 가야 하고, 병들면 어쩔 수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위험한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야 했던 아버지였다. 다섯 자식이 있지만, 그 어느 누구에게도 힘들다는 표현을 하지 않으셨던 그런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몸이 아프신데도 왜 일기를 계속 쓰셨나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상당히 긴 세월을 쓰신 것 같은데 사실 그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초에 일곱 살 난 동생이 죽었을 때, 그때 난 일기를 쓰고 있었다. 중학교 들어갔을 때부터 일기를 썼으니 일 년을 꼬박 쓰고 있었던 때였다. 그때 그 상황을 빠짐없이 써내려 간 내 일기를 나중에 아버지가 보시고 몇 날 며칠을 그 일기장을 펴보며 한쪽에서 우시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울었다. 그때 아버지는 시골집에 없었고 서울에 있는 작은아버지 일을 도와주신다고 올라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 기억에는 아주 적나라하게 당시 상황을 기록해 놓았고 사실 나 또한 그 일기를 보며 많이 눈물을 흘렸었다. 그 사건은 사춘기를 겪는 내게 정서적으로 많은 걸림돌이 되었다. 10년이 넘게 허무주의에 빠졌었으니. 결국, 나중에 그 일기가 우리 가족에게 슬픔을 주는 도구가 되는 것 같아서 아까웠지만 통째로 불에 태워버렸다. 그 일 이후로 언젠가부터 아버지가 일기를 쓰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첩이 아닌 쓰던 노트 뒷부분에 조금씩 당신의 마음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때로는 달력 뒷부분 하얀 이면에 마음의 이야기를 쏟아 놓을 때도 있었다. 우연히 그것들을 볼 때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이야기 같아서 모른 척했던 기억. 그리고는 십수 년 전부터 수첩을 구해달라고 하셨으니 그때부터 수첩에 본격적으로 일기를 쓰신 것 같다.


지금 아버지의 일기를 보면서 살아계실 때보다도 더 진하게 아버지와 만나는 느낌이 든다. 아니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깊은 경험을 하고 있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아도 가족끼리 마음 표현을 하지 않는다면 무슨 가족이라 할 수 있을까. 또 얼마나 많은 세상의 가족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들에게 꼭 한마디 하고 싶다. 나처럼 수첩이나 기억에서 부모님을 만나지 말고, 살아계신 지금 숨어있는 부모님의 마음을 꼭 만나 보시라고. 그리고 진정으로 마음을 다하여 위로해 드리시라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로 표현하시고 꼭 안아 드리시라고. 그러면 슬픔이, 괴로움이, 아픔이, 고통이 나눠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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