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꾸지 못하는 '생각'
언젠가 시골에 내려가 아버지와 오랜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고집이 너무 강해 그것을 깨뜨리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직설적으로 고집에 세다고 말할 수가 없어 ‘생각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어떤 아주머니가 남편과 아이를 칼로 찔러 죽인 실화를 사례로 들어 말씀드렸다. 또 사람이 극단적 선택을 하거나 엄청난 사건의 시작이 무슨 커다란 문제 때문이 아니며, 올라오는 부정적인 생각을 잘못 받아들여 발생한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즉, 사람은 하루에도 수많은 생각이 올라오는데 여러 생각 중에서 나쁜 생각 하나를 잘못 받아들이면 거기에 쉽게 매이게 되고, 그것이 사실인 양 받아들여 잘못된 행동으로 나타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점을 또 다른 극단의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그때는 내 주장에 대해 일부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그런 얘기를 드리면 그저 남의 이야기로만 받아들이시고 그런 생각에 빠지는 사람이 어리석다고 하셨다. 결국, 당신이 그런 생각에 잘 빠지는 줄도 모르고 남의 일로만 받아들였던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현명한 결정을 내리시는 분이 꼭 이상한 생각 하나를 버리지 못하고 늘 그 생각 때문에 여러 번 피해를 보셨다. 자업자득이었다.
큰 도로 옆에 있는 논 벼를 베는 날이다. 논 밖으로 쓰러져 있는 벼를 안쪽으로 정리하려고 논에 경운기를 갖고 갔다. 다 도착해서 농로 굴다리에서 경운기를 돌려세우려고 회전하다가 죽을 뻔했다. 그 장소가 넓어서 달리던 속도인 3단으로 가다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좌회전 키를 잡고 급히 돌다 정지 키를 못 잡고 놓쳐버린 것이었다. 달리던 속도와 급회전에 쏠려 나는 떨어져 순식간에 바퀴 밑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신없는 사이 바퀴가 굴러 내 가슴팍을 넘어갈 것 같아 이제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때 예감으로 바퀴가 나를 넘어갈 것 같았는데, 넘지 않고 나를 그대로 밀고 가다 갑자기 멈추었다. 나는 바퀴에 끼여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 겨우 빠져나왔다. 일어나 보니 배수로 콘크리트 벽에 앞바퀴가 걸려 멈춘 것이었다. 살기는 살았는데 몸이 아파 말이 아니다. 일하러 논에 온 동생에게 이 말을 했더니 이 넓은 지역에서 경운기 밑에 깔린다는 것은 말도 아니라고 신랄하게 비판을 하면서 정말 더 정신 차려야 한다고 큰소리를 질렀다. 아파도 할 말이 없었다. 사지를 못 쓸 형편이지만 사력을 다해서 논 가장자리 벼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몇 번 했더니 아프기도 하고 힘도 다 빠졌다.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어야 하는데 밥맛이 없어 죽을 먹고 싶었다. 안사람에게 아무 말 않고 죽을 끓여 달라고 했더니 밥을 두고 웬 죽을 먹느냐고 해서 그냥 죽이 먹고 싶다고 했다. 입맛이 없지만 일하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먹어야 했다. 저녁잠을 자는데 사지가 아팠다. 오전 일을 생각하면 너무나 어마어마한 일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그 생각을 하니 참 한숨만 나온다.
- 경운기에 깔려 죽을 뻔했다. (2017.10.28)
참 대책이 없는 아버지였다.
이 정도로 생각이 없었던가 싶었다. 연세가 많기 때문에 운전하는 것들에 특히 조심하시라고 전화드릴 때마다 신신당부를 드렸는데, 항상 당신을 믿고 고집을 피우시다 사고를 달고 사셨다. 농촌 일을 하다 보면 운전하는 농기계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 특히 경운기는 기본 운송 수단이기 때문에 자주 운전을 해야 하는데 사실, 경운기 운전이 쉬운 것 같으면서도 힘이 많이 들어가는 농기계다. 나도 경운기를 처음 샀을 때 호기심 가지고 운전하다가 원심력 때문에 도랑에 처박힌 일이 있어 그 뒤로는 절대로 경운기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경운기를 오래 다루셨기 때문에 항상 자만심이 있었던 것 같다. 속도가 빠를 때 갑자기 좌회전이나 우회전 키를 잡으면 순식간에 돌아간다는 것은 분명하게 잘 아실 터였다. 그런데 항상 문제는 ‘당신의 생각’이셨다. 교회에 가서도 늘 의심이 많았던 것은 다름 아닌 ‘당신의 생각’ 때문이었다. 그 생각이 성경 말씀을 이겨버린 것이고, 그 생각이 사고를 늘 불러왔다. 그것을 아시면서도 고칠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결국은 스스로 당신의 그런 모습을 생각하면서 ‘한숨을 쉬는’ 걸로 결론이 났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고가 나고 난 후에 늘 자학하고 한숨만 쉬고 만 것이었다. 그나마 살아서 한숨을 쉰다는 것이 기적처럼 여겨졌다. 결국은 그로부터 몇 개월 후 한숨을 쉴 겨를도 없이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나 버리셨지만...
한참이 지난 후에 어머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사고가 나서 병원에 다니신다는 것이었다. 동생들과 연락을 하고 시골로 내려갔다. 가서 보니 등에 상처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경운기 밑에 깔려 약 10여 미터를 끌려갔다고 했다. 땅바닥이 흙이었다면 좀 나았겠지만, 거의 자갈밭이라 온몸에 심한 흔적을 남기고 만 것이었다. 상처가 척추까지 파고 들어갈 판이었다. 그 사고로 한 달 이상을 고생하셨다. 아버지는 사고가 나면 그것을 교훈 삼아 다시는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말아야 하는데, 시간이 흐르면 또 ‘당신의 생각‘을 믿고 고집을 피우다가 크고 작은 사고를 수없이 당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넘어지지 않나, 다른 사람을 치거나 접촉 사고를 내지 않나, 포터를 운전하다 수박을 다 땅에 쏟고 도랑에 처박히지를 않나, 경운기 사고를 당하시지 않나, 모르긴 몰라도 그것뿐만 아니라 다른 농기계로 인한 사고도 많았을 것이다. 항상 지나고 나서 아들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절대로 아들들에겐 직접 말하지 않았으니까. 늘 제3의 경로로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늘 아침 먹고 나서 저승사자와 싸웠다. 오토바이에 발목을 걸고 느닷없이 도랑으로 등을 지고 철퍽 떨어졌다. 꼼짝을 못 하겠다. 오토바이가 우리 논 입구에서 왼쪽으로 넘어지려는 찰나 왼발이 허공에 뜬 것 같았고 순간 번개 치듯 불빛이 반짝거렸다. 정신을 잃었다. 다급했다. 머리와 얼굴이 물속에 있는 것 같다. 순간 숨을 멈춰야 한다고 참았다. 미끄러운 콘크리트 바닥을 가까스로 짚고 얼굴을 겨우 물 밖으로 올렸다. 참았던 숨이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발이 오토바이에 걸려 더 이상 어떻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침 지나가던 맹호가 황급히 놀라 오토바이를 들어줬고 겨우 빠져나왔다. 넘어질 때 내 머리를 콘크리트에 부딪치지 않았던 것은 아직 좀 더 살아라는 운명인가 보다. - 저승사자와 싸웠다. 2016.5.20
같은 동네에 동생(둘째 작은아버지)이 살고 있어서 농촌 일을 할 때는 늘 함께 도우면서 일을 하셨다. 작은아버지는 체구도 작고 왜소했지만, 농촌 일에는 전혀 힘든 기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소위 농촌 일에 최적화된 신토불이(身土不二) 그 자체였다. 작은아버지는 매일 하루가 끝나면 저녁을 드시고 형님에게 찾아와 그냥 졸다가 가시더라도 다녀가셨고, 마을 사람 그 누구보다도 우애가 깊었다. 그런 작은아버지가 늘 형님한테 하시는 말씀은 왜 매사에 조심을 하지 않느냐고 하시면 또 그 이야기를 가지고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곤 했다. 사실, 도시건 농촌이건 위험 요소는 어디에나 있다. 도시는 도시대로 많은 차량들이 있어서 조심해야 하고, 농촌은 그렇지는 않지만 높고 낮은 언덕과 한적한 도로 때문에 함부로 달리는 차량이 많아 늘 주위를 신경 써야 한다.
고향과 떨어진 먼 도시에 살면서 그런 아버지를 잘 챙기지 못한 것이 많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돌봐드리지 못하고 그저 잘하실 것으로 생각한 것이 내 잘못된 판단이었다. 그렇다고 아버지는 농촌을 두고 절대로 도시로는 가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었다. 일기 곳곳에 그렇게 힘든데도 농촌 생활에 행복을 느끼는 표현을 자주 하셨다. 가끔 도시로 모셔오면 몇 번 인근 경로당에 가보신 후에 이러다가 빨리 죽을 것 같다는 소리를 몇 번 하셨다. 뭔가 일을 하지 않고 세월을 보내는 모습이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걸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런데 농촌 일이라는 것은 노인이 하는 적당한 운동 정도가 아니었다. 그건 고된 노동이었고, 피곤한 삶이었다. 농촌에 터 잡고 사는 촌로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아버지는 정말 그 힘들고 피곤한 일상을 운명으로 생각하고 사셨던 것 같다. 그 운명이라는 것, 그것이 우리를 아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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