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 둔화는 내 책임 아니다.
“너는 나이 안 먹는 줄 알아?”
그때만 해도 나는 나이 안 먹을 줄 알았다. 십 대 때였으니까.
할머니가 행주를 손에 들고 행주를 찾을 수 없다고 내게 물으셨을 때, 할머니 손을 쳐다보고 박장대소를 했더니 할머니가 '에구머니나' 하시면서 내게 하신 말씀이었다. 할머니는 유난히 뭔가를 손에 들고 계시다가 꼭 그것을 찾는 이상한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뭔가를 찾으시면 나는 먼저 손부터 쳐다봤다.
또 한 번은 수건을 머리에 두르시고 수건이 없다고 찾으시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에게 차분하게 설명을 해드렸다. 혹시 찾으시려는 물건이 있으면 할머니 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먼저 보시라고 했다. 할머니는 그런 내게 '늙으면 다 그런 거야' 라고 세월을 한탄하셨다. 바로 고등학교 때 자취를 하던 시절, 할머니가 오셔서 밥을 해주시던 그 시절의 이야기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가장 큰 증거는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이다.
언젠가부터 그랬다. 젊을 때는 전화번호 숫자를 100개는 외운다고 큰소리쳤던 나였다. 그런데 50대가 지나면서 사람들의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얼굴도 잘 알고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일을 했던 동료 이름이 순간적으로 생각이 잘 안 나는 것이었다. 금방 튀어나올 것 같은 이름인데 왜 그리 머릿속에서, 또 입 안에서 빙빙 도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번은 직원들과 회식을 하는데 잘 아는 직원이 내게 잔을 들이밀었다. 술을 먹지 않아 예의상 받기만 하고 도로 잔을 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잠시 뜸을 들여 비어 있는 맥주잔에 소주를 붓고 그 친구를 부르려다 보니 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자 빠르게 머리를 돌려 '가, 나, 다'에서 '하'까지 단어를 생각하며 대입을 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다 보면 튀어나오겠지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머릿속은 그냥 폭풍전야의 하늘처럼 캄캄했다. 미칠 지경이었다. 도저히 생각은 안 나는데 그 친구는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나를 자꾸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그냥 '어이, 저기'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할 수 없이 옆에 있는 노조위원장에게 슬며시 물었다. 노조위원장이 한바탕 웃더니 가르쳐 주면서 그 친구가 다가오자 한 마디 했다. '나이가 들면 사람도 잊어버려요.' 뜨끔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그 친구는 그냥 즐겁게 술잔만 받고 갔지만, 나는 정말 심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이 현상이 언제부터 온 것인지 한 날은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40대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다. 자동차 열쇠에는 회사 책상 열쇠가 함께 붙어 있었다. 퇴근할 때 꼭 보안 점검을 하고 시건장치가 잘 되어 있는지 확인한 후 사무실을 나서곤 했다. 늘 하는 일이었는데 어느 날 차를 몰고 사택으로 퇴근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책상을 잠근 후에 그 키를 책상 위에 놓고 온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자책하며 다시 차를 돌려 회사 쪽으로 갔다. 가다 보니 운전석 시동장치에 자동차 키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차를 운전하고 있으니 키가 거기 붙어 있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그걸 보며 기가 막혀서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지 차를 세워놓고 한참을 허망하게 앉아 있었다.
그래, 그 현상이 40대부터 그랬던 것 같았다.
물론 그때는 기억력이 없어서라기보단 다른 골똘한 생각 때문에 순간적으로 엉뚱한 판단을 한 것 같긴 하다. 어찌 됐든 그런 해프닝이 몇 번 있었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생각났다. 유대인 500백만 명을 아우슈비츠로 보낸 독일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때다. 이스라엘 법정에서 그 세기의 재판을 지켜보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명언이었다.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내가 지금 그러고 있었다.
깊은 사고 없는 생각의 무능이 바로 차를 돌리는 행동의 무능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즉, 아무 생각이 없는 행동은 유죄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기억력 노화현상을 거기까지 빗대는 것은 맞지 않다. 그렇잖아도 슬프게 나이 들어가는 시니어에 대한 예의는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순전히 이것은 나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을 굳이 오해까지 할 필요는 없다.
“너는 나이 안 먹는 줄 알아?”
예전에 새롭게 부임하신 60대 넘은 사장님이 부서별로 돌아다니면서 부임 인사를 했다.
사장님이 직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명찰을 보고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두 번, 세 번씩 그 이름을 반복하는 것을 보았다. 가능한 한 빨리 직원들의 이름을 기억하려고 얼굴과 매치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 또한 한 사업소에서 백여 명이 훨씬 넘는 직원들의 이름을 다 외우고 얼굴을 매치시키기까진 몇 달이 걸렸다.
그런데 외우고 나면 또 잊어버리고 그것을 자꾸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외운 이름들이었는데도 마치 포맷된 컴퓨터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버릴 때는 그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얼굴과 이름을 프린트해서 갖고 다닐 수는 없었다. 부임 초기에는 총무차장이 그렇게까지 해줬다. 하지만, 몇 달이 흘렀는데도 기억이 안 날 때는 내 기억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냥 조용히 입을 닫았다. 어쩔 수 없는 침묵 모드는 그렇게 나를 피곤하게 했다.
“너는 나이 안 먹는 줄 알아?”^^
이제는 어느덧 세월이 많이 흘렀다.
물론, 기억력 감퇴는 슬픈 일도 아니고 무능한 일도 아니다. 더구나 내가 그 무자비하고 생각 없는 아돌프 아이히만도 아닌데 심하게 한나 아렌트의 말을 언급한 것도 분명 잘못된 일이다. 그냥 나이가 들어가는 자신이 안타까워 그렇게 되뇌었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누구에게나 그 시기는 반드시 찾아온다는 점이다.
눈앞에 반가운 사람을 보면서 그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때 그 민망함을 어떻게 설명할까. 그것을 생각하면 인생이 허탄하기도 하지만, 그런 기억력 감퇴가 불신과 염려, 걱정과 근심을 생각나지 않게 하는 긍정적 요소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 기억력을 탓하지 말고 나이에 걸맞게 용량을 조절하려는 창조주의 섭리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어쩌면 그런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크게 연연치 않는 것이 오히려 시니어의 멋진 미래를 만들어 가는 첩경이 아닐까. 손에 행주를 들고 행주를 찾으셨던 할머니가 그립다.
'할머니 저도 이제 나이를 먹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