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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산박 Aug 17. 2022

고양이 밥 주는 여자

그들의 심리가 궁금했다.


밤 열 시만 되면 둘이 나간다.

언제 구입했는지 비올 때는 우비까지 걸치고 완전 무장한 채 나간다. 그냥 나가면 되는데 비 온 날은 이 비에 어떻게 그네들이 살아가느냐고 안 그래도 무거운 우비에 걱정까지 무겁게 걸치고 나간다.  

도대체 아무리 이해해 보려고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다.

난 밖의 고양이들에게 사람이 먹을 것을 주면 안 된다고 늘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내가 고양이를 싫어해서도 아니고 냉혹 인간이기 때문도 아니다. 비록 밖에는 먹을 게 없다 하나 밥 주는 일이 그들의 야생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그들이 사람만 의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에서 일까. 어떤 의무감 때문일까? 단순히 불쌍해서일까? 아니면 선한 일을 함으로 하늘의 보상을 꿈꾸고 있어서일까? 아무리 회로를 돌려도 두레박이 열 길도 아닌 한 길 사람 마음의 우물에 닿지를 않는다.


"왜 가는 거야?"


저녁 늦게 고양이에게 줄 여러 가지를 챙기는 그네들을 보고 툭 말을 던진다. 

그 말에는 약간의 불만도 묻어 있다. 방안에 있는 녀석들 챙기기도 힘들어하면서 왜 밖에까지 나가야 하느냐는 투정 섞인 질문이다. 


"그냥"


돌아온 답은 너무 황량하다. 마치 사막에 선 기분이다. 

그것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말해 봐야 이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여기서 끊겠다는 말이다. 설명이 길어지면 혹 다툼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에 미리 최소한의 단어로 단속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냥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나가고 있는 선한 목자들에게 자꾸 말꼬리를 잡는다. 


"지금 바쁘니까 그만 묻고... 이런 때는 좀 잘 갔다 오라고 하면 안 될까?"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고양이 밥을 주기 시작한 것은 벌써 일 년이 넘은 것 같다. 그런데 이 일을 시작하고 생긴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고양이 밥도 사야 하고, 우비도 사고, 밥그릇도 사고... 심지어 고양이 밥을 주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앞동 할머니와 다툰 일도 있었다고 한다. 경비들과도 마찰이 있었다. 어떤 경비는 좋은 일 한다고 옹호해 주기도 했지만, 어떤 경비는 싫어하는 주민들이 전화가 와서 고양이 밥을 주지 않도록 단속해 달라고 요청해서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제지했다고 한다.


'참 일을 만들어서 한다' 


재작년 추석 때 시골에 갔다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고양이 새끼 세 마리를 외양간 쪽에서 발견했다. 어미가 먹지를 못해 새끼만 낳아놓고 며칠 째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녀석들을 살리기 위해 아내는 급히 젖병을 샀고 우유를 주기 시작했는데 그 녀석들을 그냥 둘 수 없어 데려온 것이 발단이었다. 

분명 그때 약속을 했다. 서울 데려가면 모두 분양하라고. 그 다짐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 다짐은 사랑, 연민, 긍휼이라는 무기가 공성퇴에 실려 사정없이 날아오자 그저 힘없게 무너지는 성이 되었다. 그 이후로 지금처럼 밤 일이 시작되었다. 외연의 확장이었다. 


"그건 도대체 무슨 사명감이지?"


며칠 그 이야기는 꺼내지 않다가 한 날은 지나가는 말로 다시 그 얘기를 꺼냈다. 

그 말속에는 우리가 할 일도 많고 세상을 살면서 시간을 보다 알차게 써야 하는데 별로 생산적이지 않는 일로 시간을 보내면 되겠느냐는 불만 섞인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말투는 곱게 나갔다. 나름 좋은 일을 한다는 사람한테 그런 일로 다투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다른 거 없어. 그냥 불쌍해서야." 


세상에는 불쌍한 것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유기견도 불쌍하고, 멍에 맨 소들은 안 불쌍한가. 짐을 지고 가는 나귀들이나 말들은? 하루 종일 목이 묶여 있는 밖을 지키는 개들은? 아니 그것들은 짐승이지만 짐승보다 못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말이 좀 이상하지만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짐승 이하의 대접을 받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냐는 것이다. 차라리 소외된 어르신들을 돌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알아주지도 않고 도와줘도 감각도 없는 그네들을 돌보는 것보다.

     

"불쌍한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내 이야기는 그런 좋은 일을 하려면 짐승이 아닌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나라고 짐승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네들의 일이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왜 시간과 돈을 들여 그 일을 해야만 하느냐, 꼭 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내 상상을 뛰어넘는 형이상학적인 고단수 독백이었다. 좀 더 나쁜 말로는 가관이었다.   


"그래, 불쌍한 사람들 많지. 그런데 더 불쌍한 것은 겉이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 속이 불쌍한 사람들이야. 자, 쉽게 이야기할게. 이 고양이들을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대체해 보자. 우리 방안에 함께 사는 고양이는 우리가 늘 보잖아. 우리는 사람들을 볼 때 겉으로 다 괜찮은 것처럼 생각해. 때에 따라 밥도 잘 주고 늘 잘 챙겨주거든. 근데 밖에 있는 고양이는 별로 관심도 없잖아. 그네들은 숨어서 살아. 사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며 가까이하지 않지. 그건 바로 세상과 힘들게 싸우고 있는 우리 숨어 있는 마음과 똑같은 거야. 누가 돌봐주기라도 해? 아냐 그냥 방치하는 거지. 그러다 보면 어떻게 돼? 말라죽어가는 거야. 지금 난 겉으로는 배고픈 고양이 밥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날마다 두려워 떨며 어둠 속을 헤매는 그 사람들 마음을 치유하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


"내 말이 틀렸으면 이야기해 봐. 사람들은 모두가 방안에 사는 고양이처럼 평안해 보이고 부족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여. 그런데 그 마음 깊숙이 들어가 보면 세상과 만나고 싶지 않은 마음, 숨어 있고 싶은 마음, 두려운 마음들이 쪼그리고 눈치를 보며 살고 있어. 저 밖의 고양이처럼. 비가 오면 더 꼭꼭 숨어버리지. 누군가가 마음에 상처를 입히면 더 보이지 않은 방으로 들어가 버려. 우비를 왜 입을까? 비 피하려고? 아냐. 그냥 내가 맞고 싶어서 맞는 거야. 비 오는 날에도 그네들이 나를 마중하러 나온다는 사실을 생각해 봐. 나는 지금 두려워 숨어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만나고 있다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나는 밖의 많은 고양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만나게 될 거야. 그때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내가 고양이 밥을 많이 줘  봤거든..."   


"치유 연습이었던 거야?"


"어둠 속에서 고양이가 슬금슬금 기어 나와. 여기저기 눈치를 보면서. 그리고 나를 보면 반갑게 가까이 다가오지. 내가 오래 됐거든. 가까워졌거든. 밥을 내밀면 손에 잡힐 듯 바로 앞에까지 와. 야생의 고양이들이 절대로 사람 앞에 나오지 않지. 먼저 어미가 나타나고 그다음에 새끼들이 숨어 있다가 깩깩 소리를 내며 다가와. 얼마나 귀여운지 알아? 밖에 사는 고양이들 눈 봤어? 녀석들이 사람을 보면 눈동자가 수직으로 1자가 되잖아. 경계심이 최고조인 거야. 그런데 나를 만나면 눈동자가 동그랗게 돼. 그건 무장해제 표시고 나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여긴다는 뜻이야. 트라우마라는 고양이가 있어. 오래전에 상처를 입은 고양이야. 그 녀석을 불러내려면 기다림의 인내가 필요해. 그런데 막상 슬금슬금 기어 나오면서 자신을 다 보여주지. 딸린 식구들까지 데려와.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어? 상처가 치유되도록 영양가 있는 밥을 내놓아야 할 것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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