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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an 10. 2024

당신하고는 사랑을 했네요

첫인상을 믿지 않는 사람 2편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당신 같은 사람하고 내가 밀접해지기는 애당초 글렀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도 나를 모르고 나도 당신을 모르는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이 가진 삶이 내 것과 너무 다르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어울리는 사람들이 나와 어울리는 사람들과 너무 다르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손수 펼쳐 놓은 세계와 내 세계가 겹치는 부분은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렇게 함께 있네요. 이미 오래오래 함께 있었네요. 너무 가까워서 너무 닮아서 가끔 누가 누구인 줄 잘 모르면서 우리는 같이 있습니다. 한 번씩 나는 당신 이름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봐요. 내 이름보다 그 이름이 더 익숙해서. 그게 내 것 같아서.   


 완전히 반대로 걷는 줄 알았던 우리가 실은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 내면의 속성이 놀랍도록 동일하다는 진실 앞에 섰을 때 나는 경악했습니다. 그때도 첫인상이라는 게 참 부질없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나는 당신에 대한 내 첫인상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당신 쪽으로 성큼 다가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자꾸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을 바라보았습니다. 자꾸 보게 되어서 자꾸 보고 싶어서 보았습니다. 그러다 차츰 알게 되었습니다. 진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처음에는 점점 달라 보이는 당신이 당신이 아니라 내 환각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나 보고 싶은 대로 보기 시작했구나, 내가 미쳐 가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그게 진짜더라고요. 한참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게 진짜라는 걸.  


 웃기지 않나요. 가짜도 진짜도 선뜻 믿지 못하는 내가. 희한하게 그때는 그렇더라고요. 당신을 너무 원하니까 머릿속이 어지럽기만 하더라고요. 바보가 된 기분으로 이것도 저것도 마음 편히 믿지 못하고 나는 당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거 하나만 제대로 했습니다.  


 그때는 그걸로 족했어요. 그것만 해도 넘치게 좋았던 겁니다. 그때 내가 원한 건 그냥 내일의 내 하루에도 당신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뿐이었습니다.    

  

 당신은 처음부터 내 너머에 있는 나를 보았다고 했죠. 시퍼런 칼날이 아니라 칼자루 쥔 피투성이 손을 보았다고 했죠. 덜 가려진 내 불안이 그 불안을 만든 내 유년이 보였다고 했죠. 그래서 내가 궁금했다고 했죠. 자꾸 웃는 얼굴로 우는 내가 짜증날 정도로 계속 생각났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말을 절반 정도만 믿었습니다. 사실은 다 믿고 싶었는데 억지로 그만큼만 믿었습니다. 다 믿기가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일평생 나를 제대로 봐 주는 사람을 기다려 왔는데 막상 나를 꿰뚫어보는 사람이 나타나니 두려웠던 겁니다. 막연히 두려웠어요. 당신 말을 다 믿으면 내가 어떻게 될 거라는 생각이 있었던 게 아니라 막연히 두려웠던 겁니다. 그때 내가 두려워한 건 정확히 뭐였겠습니까. 아직 얻지도 않은 당신을 잃을까 벌써부터 두려웠던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나는 내가 그토록 열망해 온 사람이 당신일 수도 당신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열권으로 떠오르다 내핵으로 침잠하길 반복했습니다. 당신이 그런 사람일 거라 생각하면 어떤 결승점, 최종 결승점에 도달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살면서 내가 얻고 싶어 한 평안이 어떤 건지 그때 알았습니다. 나는 나를 알아보고 믿어 주는 사람과의 안정된 관계를 통해 삶의 궁극적인 평안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삶이 당신에게 있다고 속단하고 당신은 당신이 외면한 당신 삶을 내 삶에서 발견했을 겁니다. 나는 당신을 부러워하면서 당신은 나를 가여워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문득문득 닿았을 겁니다. 그게 불편한데 너무 좋아서 필요해서 서로를 자꾸 보게 됐을 겁니다. 서로를 보면서 자기를 자꾸 맞닥뜨리게 됐을 겁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서로를 빌리지 않고도 자기를 볼 수 있게 됐고요.

 
  시절마다 그런 사람을 꼭 한 명은 만나게 됩니다. 내가 못 찾은 나, 내가 내다버린 나를 전면에 내세우고 저벅저벅 걸어오는 사람. 나는 그들 중 어떤 사람과 크게 다투고 어떤 사람과는 사랑에 빠집니다. 당신하고는 사랑을 했네요.

  

 그동안 삶이 나에게 준 숙제를 내가 얼마나 잘해 왔는지 나는 모릅니다. 죽어서나 채점표를 받겠죠. 여태 나에게 주어진 모든 숙제들이 결국에는 한 가지 능력을 기르기 위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합니다. 나를 알고 모두를 사랑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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