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이 결국 내 삶이 된다 1편
한 해 한 해 나이 먹을수록 내 말이 결국 내 삶이 된다는 이야기를 뼈저린 현실로 맞닥뜨리는 순간이 많아집니다. 내 삶을 만드는 내 말은 언제나 동사動詞입니다. 주어는 뭐가 됐든 상관없어요. (동사와 비교했을 때는) 주어에 별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내가 자주 말하는 동사가 내 삶의 동작이 됩니다. 내가 내 이야기는 하나도 안 하고 다른 사람들 이야기만 해도 그 이야기 속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동사가 내 삶에 역동을 일으킵니다. 그 역동이 내 삶의 구조와 밀도를 바꿉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남 흉 보는 사람 치고 번듯한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은 틈만 나면 ‘망했다, 망해라, 잘못되었다, 실패했다, 지고 있다, 글렀다, 텄다, 엎어진다.’ 같은 말을 합니다. 사람에게도 그런 말을 하고 상황을 두고도 그런 말을 합니다. 아직 뭐가 어긋나지 않았는데도 그런 말을 합니다.
그들의 비관하는 말, 저주하는 말은 그들 입 안에 붙은 채 무럭무럭 자라 자꾸 입 밖으로 비집고 나옵니다. 습벽이 된 말은 그렇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이렇다 할 의도가 없는데도 그런 말부터 하고 보는 자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자기를 목도하고 놀라 소스라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자기로부터 무심히 주의를 거두고 살던 대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고 살아도 괜찮다고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언어의 날카로운 기운 즉 살기는 발화자의 몸과 마음에 제일 먼저 닿아 부정적인 작용을 일으킵니다.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말소리가 사라지면 그 영향도 사라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겁니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욕받이 나무 이야기를 아시나요. 그 부족 사람들은 기분이 나빠지거나 누군가와 대립할 때마다 특정한 나무 앞에 가서 나무를 보고 욕합니다. 차마 사람한테 욕을 할 수는 없으니 나무에게 욕하는 것 같은데요. 그 부족의 욕받이 나무는 다른 나무들보다 병에 잘 걸리고 빨리 죽는다고 합니다.
그 비슷한 예가 국내에도 여럿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말의 위력을 가르치고 싶은 교사가 학교 교실 창가에 ‘사랑해.’ 양파와 ‘미워해.’ 양파를 두었다는 이야기 들어 본 적 있나요. 교사의 지시에 따라 아이들은 ‘사랑해.’ 양파에게 매일 사랑한다고 말하고 ‘미워해.’ 양파에게는 매일 미워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두 양파의 성장 속도나 모습 따위를 주기적으로 기록합니다.
‘사랑해.’ 양파의 발육 상태와 ‘미워해.’ 양파의 발육 상태는 언제나 같지 않습니다. 욕받이 나무처럼 ‘미워해.’ 양파는 늘 시들하거나 곧 죽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현상에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말 같은 건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 여기는데요. 그런 사람도 불평하고 비난만 하는 사람 곁에 있다 보면 극도의 피로감을 느낍니다. 자기 에너지가 필요 이상으로 소모되거나 손상되고 있다는 걸 실황으로 느끼는 겁니다.
요컨대 부정적인 말은 그 말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상하게 만듭니다. 아까 말했듯 그 말이 제일 크게 무너뜨리는 건 그 말의 주인이고요.
나는 누누이 생각합니다.
내 입과 가장 가까운 건
언제나 내 귀라는 걸.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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