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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an 31. 2024

우연과 운명이 가져다준 의외의 행복

 「내가 살면서 내린 모든 결정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말에는 분명 일리가 있다. 일리는 있는데 이 말이 진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때로 이것은 가혹한 주장이다. 인간의 손 밖에서 일어난 일들이 인간 생에 벌이는 대규모 난장들과 그 파급력을 생각하면 인간의 선택만이 인간 생을 조성한다고 여기는 건 어리석은 속단이다.」

 

 얼마 전 일기 삼아 써 놓은 이 짧은 문단을 오늘까지 거의 매일 들여다보았습니다. 별 생각 없이 갈기듯 써 놓은 문장들이 가끔 체기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한동안 얹혀 있곤 하는데 이번에는 이 문단이 그랬네요. 요즘 같은 연말연시에 곱씹기 좋은 문단 같습니다. 따뜻하게 내린 차 한 잔 마시면서요.


 ‘내가 살면서 내린 모든 결정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라는 문장을 읽고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어떤 감정을 느낄까요. 언제부턴가 나는 이 문장을 마주할 때마다 선박 속 방향타와 바다의 풍랑을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20대 초까지는 내 삶을 온전히 내가 좌우할 수 있다고 나는 믿었습니다. 내가 받고 싶지 않은 영향은 안 받으면 그만이라고 자신했습니다. 피하고 싶은 건 다 피할 수 있다고 자만도 했습니다. 내가 쥐고 있는 내 인생 방향타만이 내 삶의 진로를 결정한다고 믿은 겁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빳빳하던 콧대가 산산조각 났고요. 맥없이 좌초했습니다.  


 완전히 허물어진 채로 나는 항복하듯 인정했습니다. 인생은 바람 하나 없고 장애물 하나 없는 곳에서 자기 뜻대로만 나아가는 간단한 행위가 아니라는 걸요.  


 사실 속으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사는 동안 오만가지 것들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가로막고 떠밀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그것들이 나를 얼마나 억세게 밀쳤는데요. 때로 그건 헤어날 길 없어 보이는 빈곤이었습니다. 때로 그건 무신경하고 폭력적인 집안 어른들이었습니다. 때로 그건 내가 하지 않은 말을 내가 한 말이라고 떠들어대며 나를 즐겁게 즐겁게 짓밟거나 그런 상황을 조용히 부추긴 동급생들이었습니다. 때로 그건 내가 아버지 없이 자랐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하대하고 배제하는 이들이었고요. 때로 그건 대학교 똥군기 문화를 대놓고 옹호하는 교수들과 그 교수들 비호 하에 신입생들을 밤낮없이 갈구는 상급생들이었습니다. 그 외의 온갖 것들 또한 나를 이리저리 밀어댔습니다.  


 그런 환경적, 관계적 변수들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이곳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내가 지금의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일례로 내가 처음 들어간 대학교에 똥군기 문화가 없어 내가 그 사범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더라면 지금 나는 중·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30대를 보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또래 관계 안에서 간교한 이간질이나 따돌림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악에 받쳐 툭하면 욕하고 모두와 싸울 준비를 하며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 발악하던 고등학생도 없었을 거고요. 그 작은 마음 안이 진창이 아니었더라면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초등학생 때부터 매일 일기를 몇 장씩 쓰지도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랬다면 내가 글쓰기에 재미를 붙이지 않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열아홉 살에 대학교에서 뛰쳐나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커피 학원에 들어가는 일도 없었을 테니 이렇게 매일 커피 내려 마시고 매주 커피콩 볶는 나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어려서 간사한 사람들을 지겹게 만나 보지 않았더라면 지금은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고요. 소꿉 친구였던 사기꾼에게 전재산 빼앗기고 할머니한테 매일 들볶이다 가출한 엄마가 남긴 빈집을 보지 않았더라면 돈 관리를 이렇게 열심히 하며 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가난한 집에서 돈 없다는 이야기를 아침 저녁으로 들으며 자라지 않았더라면 공부 열심히 해 번듯한 사람 돼야겠다는 생각을 이렇게 간절히 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들로부터 그렇게 큰 상처를 입지 않았더라면 사람 마음 안에 난 상처들에 이렇게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고요. 그랬더라면 심리학이나 미술 치료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죠. 심리 상담, 심리 치료를 업으로 삼고 있는 지금의 나도 없었을지 모른다는 겁니다.


 어렸던 내가 목표한 것들 가운데 대부분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나는 의외로 행복하게 잘 지냅니다. 합리화를 잘한 케이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 한들 나는 지금의 나에게 만족하는 내가 좋고 다행입니다.  


 오래 전부터 내가 추구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삶을 꾸려 놓았기 때문에 내가 오늘날 나에게 큰 불만을 갖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모로 갔는데 용케 서울에는 도착한 것 같네요. 당장의 성과를 얻지 못해도 내 안의 목소리를 저버리지 않은 나에게 고맙습니다. 사실 그건 용기 내서 한 일이 아닙니다. 그 목소리라도 붙들고 있어야 살겠으니 악착같이 거기 매달려 있었을 뿐입니다. 그건 담력이 아니라 생존 본능으로 내가 한 일인 겁니다. 그래도 나에게 고맙습니다. 코앞의 길을 잃어도 방향은 잃지 않은 것이 고맙습니다. 지금의 나는 어린 내가 되고 싶었던 사람과 얼추 비슷합니다.     


 당신이 어릴 때 꿈꾸었던 어른 당신과 지금 당신 사이에 격차가 있다면 그건 어떤 격차고 당신은 그 격차를 어떻게 느끼나요. 내 경우 그 격차가 삶에 대한 전반적인 만족도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치는데 그 만족도는 삶의 질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내가 꿈꾸는 나와 오늘의 나 사이 격차 그리고 그 격차에 대한 내 반응을 내가 잘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누누이 생각합니다. 항상 더 나은 나를 만들고자 하되 그 목적이 오늘의 나를 학대하는 도구가 되지 않도록 하려는 겁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역효과를 내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지 않습니까.


 목표가 구애가 되지 않게 하려면 목표보다 일과를 더 자주 생각하는 편이 좋다고 나는 느낍니다. 가고 싶은 지점, 가야만 하는 지점을 지나치게 생각하면 지금 여기에서 내가 불쾌하고 불행하더라고요. 이상이나 당위와 불일치하는 현실 때문에 초조해서요. 그러는 것보다는 오늘 내가 해야 하는 일, 하면 좋은 일에 매진하는 게 나에게 더 이로운 일입니다. 목표 지점과 내 발밑 사이의 거리 같은 건 가끔씩 가벼운 마음으로 점검하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매일 내가 그 격차를 얼마나 좁혔는지 계산하는 것보다는 내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문득 확인하는 게 나에게 더 이로운 일입니다.


 당신은 오늘 어디로 가고 있나요. 당신의 북극성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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