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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종 종Mu Dec 30. 2022

여운이 인색한 선물

겨울 흰떡

#.

유리병 속에 보리알이 가득했다.

어느 날 사촌동생이 준 선물이다.

누구보다 실속파 주부인 동생이 이런 장식용 잡곡을 샀을 리 만무한데?

보나 마나 아직 아가씨인 딸이 가져다준 것일 게다.

어쨌거나 받아서 선반에 올려둔 지 여러 달. 따로 불렸다가 쌀과 섞어 밥을 한다는 게 은근히 귀찮아서. 그리고 유리병 안에 담긴 채가 더 보기 좋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렇게 하냥 눈요기나 하며 살았는데.

올겨울 흰 눈이  내리면서 새들은 이럴 때 뭘 먹고 견디는지 궁금하기도 하면서 유리병을 열게 되었다.

매일 엄지 손가락만큼씩 뿌려준다.

이것이 소복눈이 내려쌓였던 그 날 이후 거의 매일처럼 되풀이하는 일이지만, 사실은 여태껏 새가 마당에  내려앉는 현장을 목격한 적 없다.  그렇다해도  새가 다녀간 건 확실하다.

오후가 되어 문 열고  내다보면 흩어놓았던 보리알은  깨끗이 안 보인다.

콕콕콕 쪼아 먹고 가 버린 새.

오늘도 다녀간 그 녀석이 침침이일지 씁씁이일지...

 마리일지 두 마리 한 쌍일지...

아무 것도 모른다.

언젠가 알게 되겠지.


#.

좀 다녀가.

평소보다 더 진지한 목소리.

달려가보니 침대 아래 서너 개의 보퉁이가 묶여 있었다.

언젠가 말했기 때문에 다음날 요양원에 가 보기로 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웃집 어르신 말이다.

한번 가 보자고 했어.

나는 그 가 보자는 말을 입소하겠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언젠가 가게 될지 모르니 미리 사전답사 다녀온다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저 보따리는 뭐예요? 가서 맘에 들면 바로 입소하시게요?

그래야지.

그러면 이별인가 싶지만 만약 맘에 안 들면 돌아온다고 하니 딱 부러지게 송별사를 나눌 수도 없었다.

지금은 모르고 가 봐야 알겠네요. 그럼 내일 저녁에 전화드릴게요. 입소하신 건지 돌아오셨는지...


그다음 날 저녁 나는 약속대로 전화를 드렸다.

어디셔요.

거기여.

깨끗하고 괜찮아서 바로 결정하고 지금 잠자리에 누워있다는 대답이었다.

전화를 끊고서야 지난밤 잠깐 본 것이 영이별이었음을 깨닫는다.

그 요양원은 듣자니 서울이 아닌 부천 어디께라 하던데... 멀기도 하지.

어르신과는 이웃이라는 인연으로 자주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객관적으로 매여진 관계는 아닌 이상 내가 굳이 찾아가겠다 고집부린다면 그게  오히려 그분의 가족들에게 이상하게 비칠 것이다.

새삼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고나서 생각하니 지난밤 잠시의 대면이 내 생애 처음이었을  심상한 이별이었던 셈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할머니가 떡을 주셨네.

마지막 선물이 한 줌의 흰 가래떡이었다.

농담 같아서 실소가 나올 뻔했다. 마지막 선물치고는 뭔가 아주 시시한데?ㅡ 하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전후좌우로 되새김하면 그게 좋았다. 완전히 결정 나지 않은 일을 앞두고 가장 미련이 남는 말동무. 어르신쪽에선 바로 그게 나였을 것이다. 미리 이별을 설정하고 싶지 않은 그 어정쩡한 시각에, 그래도 혹시 몰라  기별이라도 해 놓아야 맘이 놓였을 터이다. 그 미련과 결단 사이에 오락가락한 채로 눈앞의 나에게 뭔가 주고도 싶고 그러면 안 될 것도 같고 그랬던가 보았다.


검지손가락 길이쯤 되게 잘라진 세 조각의  가래떡은 내게 많은 생각을 일으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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