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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주는 힌트를 잡았어야 했다

3부 - 삶을 바라보는 태도의 실패

by 박기주

삶은 누구에게나 힌트를 준다.

“너, 이렇게 하면 잘 살 수 있어”라는 일종의 단서다.

이번 실패담은, 그 소중한 힌트를 놓쳐버린 이야기이다.


고등학교 입학 후 첫 시험에서 전교 391등이었던 나는, 3학년 2학기 모의고사에서 전교 1등을 처음으로 거머쥐었다. 실제 수능은 이보다 좀 떨어져 전교 4등 정도였는데 (내 앞의 1·2·3등은 서울대 의대로 갔고 나는 서울대 공대로 갔다) 그래도 1학년 때 생각하면 극적인 변화였다.

아직도 가지고 있는 당시의 성적표. 점수가 안 좋은 건 극악의 난이도라서...

고가의 과외나 유명한 학원을 등에 업은 건 아니었고, 혼자서 필사즉생의 각오로 공부를 하다 보니 3학년이 될 무렵 ‘시험의 감’이 잡혔다. 학교 시험이든 수능이든 출제자의 의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는 매달 모의고사를 칠 때마다 성적이 올랐다. 특히 언어영역은 지문을 대충 읽어도 정답이 보여 실제 수능에서도 시간을 절반 이상 남기고 문제를 다 풀었지만 점수도 거의 만점이었다.


어디 가서 자랑할 거리는 아니지만 어린 시절의 이 ‘역전 경험’은 내 인생에 큰 자신감을 주었다.


“나도 할 수 있다”, “무슨 일이든 노력하면 되지 않을 리 없다”와 같은 순진하면서도 확고한 생각을 열아홉 살에 갖게 된 것은 그 믿음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떠나 무척 도움이 되었다. 취업 면접에 떨어져도, 회사 승진에서 밀려나도, 이직이 불발되고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 앞날이 불투명해져도 혼잣말로 “괜찮아, 그때도 해냈잖아. 이번에도 할 수 있어”라고 습관적으로 중얼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 작은 성공이 준 ‘인생의 힌트’는 그냥 자신감을 갖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었다.




전공이 마음에 안 들어서인지 학교에 실망해서인지, 대학생이 된 나는 더 깊은 공부를 해야 할 나이에 아예 손을 놓아버렸다. 수업도 잘 들어가지도 않고 과제와 시험만 대충 해결하는 정도였다. 당연히 1학년 1학기 성적은 전 과목이 C, 말 그대로 형편없었다. 군대 다녀와서는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열의는 없어 졸업에 필요한 최소 학점을 한 학점도 초과하지 않았고 재수강도 4년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냥 졸업만 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공부를 다시 시작한 건 세월이 한참 흐른 뒤 경영대학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이번에는 대학교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스스로 지원을 하여 잡은 기회였고, 회사 생활을 하면서 궁금해하거나 답답해하던 부분을 해결하기도 하고, 배운 것을 다음날 회사에서 바로 써먹기도 하니 수업이 재밌었다.


관심을 가지고 임하니 오래전에 잊었던 ‘시험의 감’이 다시 돌아왔다. 교수님들이 발표 숙제든, 리포트든, 시험이든 무엇을 원하는지 느껴졌고, 크게 공을 들이지 않아도 A+가 쏟아졌다. 결과는 수석 졸업. 100명이 넘는 동기들 가운데서 말이다.


그러면서 겨우 알게 되었다. 내게 ‘출제자의 의도를 읽어내고, 시험이라는 틀 안에서 노력 대비 최선의 결과를 뽑아내는 능력’이라는 강점이 있음을.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미 대학 때 공부와 이별을 했고, 그 뒤에 선택한 커리어도 이런 강점과 관련된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어디를 가서도 공부할 때와 같은 괄목할 만한 성과는 내지 못했고 늘 평균, 잘해봐야 평균보다 살짝 높은 정도에 그쳤다.


마케팅 본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기는 한데, 고객이나 소비자의 니즈를 이해하고 이에 부합하는 가치를 제시하는 것은 내가 가장 잘하는 영역은 아니다. 그러니 이토록 스트레스받으며 실적 때문에 고생을 하는 것이다.




누구나 살다 보면 인생이 ‘너는 이렇게 살면 잘 살 거야’ 하는 힌트를, 적어도 한두 번쯤은 주기 마련이다.


스스로 깨닫기도 하고 부모나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고 알려주기도 한다. 그 힌트를 잡고 잘 활용한 사람은 더 효과적이고 수월한 인생을 살 수 있다. 어린 나이에 특정 스포츠에 투신하여 대성한 선수들이나, 10대 초반부터 연습생 생활을 거쳐 성공한 아이돌 가수들, 혹은 수학, 음악, 미술처럼 특정 분야에 강점을 발견하여 빼어난 성과를 거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이를 증명해 준다.

나는 상기했다시피 고등학교 때 그 힌트를 아주 뚜렷이 받았다. 그때 “나도 해낼 수 있다!” 자신감을 갖는 것에 그치지 말고, 한 발 더 나가야 했다. “아 내가 시험을 잘 치는구나. 이쪽에 강점이 있구나!” 하는 생각까지 치고 올라가야 했다. 확신이 없으면 이런저런 공부를 더 하고 시험을 치르면서 스스로의 가정을 검증하면 될 일이었다. 나이 들어서 경영대학원에서 검증할 게 아니라 스무 살, 스물한 살 때 했어야 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강점을 확인하고 검증했다면, 마음에 드는 분야를 잡아 석사, 박사 등 계속 공부를 하면서 가급적이면 평가를 받아 결과가 나오는 분야로 갔을 것이고, 내 나이에 말할 수 있는 성공 스토리가 고등학생 때 성적 오른 것 정도에 그치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의 공부와 시험을 도와주는 쪽으로 가도 좋았을 것이다. 실제로 대학생 때 과외로 가르친 학생들의 성적은 초등학생부터 고3까지 한 명도 빠짐없이 꽤나 올랐다. 소개를 받아 학원에서 강사를 하자는 제안을 받은 적도 있는데, 그때는 강점이라는 개념조차 염두에 없어 거절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조차 아쉽다.




단순히 강점을 찾고 극대화하려는, 뻔한 자기 계발서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이 주는 힌트를 감지하고 잡으라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잘하는 것이 없는데?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도 자신이 가진 속성 중에서 상대적으로 더 나은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 공부를 못하는 사람도 점수가 몇 점이라도 잘 나오는 과목이 있고, 운동신경이 없는 사람도 그럭저럭 해낼 만한 운동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것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객관적으로 입증이 되거나 주관적으로 확신을 준다면, 인생이 주는 힌트라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경우, 예전의 내가 그랬듯 그 힌트들을 무시하거나 잘못 해석한다. 그래서 훤히 뚫려 있는 고속도로로 가지 않고 험한 길을 빙빙 돌아가거나, 길을 반대로 가서 평생을 고생하기도 한다. 축구에 어마어마한 자질이 있는데 평범한 농구 선수로 살거나, 기가 막힌 색채 감각이 있는데 회사에서 경리일을 하는 식이다.

난 초중고 12년을 개근했다. 이것도 어찌 보면 인생이 주는 힌트였을지도 모른다. 끈기하나 믿고 가라는


나는 이 방면에서는 확연히 실패했다. 지금 와서 돌이킬 수도 없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자식들에게 주어지는 힌트가 뭔지 알아채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이가 남들보다 잘하는 것, 그러면서 좋아하는 것, 그러면서 돈도 벌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다면 유치원생 아니 어린이집 다닐 때부터 미친 듯 앞으로 달려만 가는 이 숨 막히는 학업 경쟁체계에서 벗어나 좀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이다. 물론 힌트를 깨닫고 이를 써먹는 것은 전적으로 아이에게 덜린 일이겠지만.


삶은 전반적으로 불친절하지만,

가끔 우리에게 위로하듯 ‘힌트’를 던진다.

나는 그 힌트를 잡았어야 했다.


이것이 내가 실패한 열다섯 번째 이유다.


(첨부한 모든 이미지는 Vecteezy.com에서 구입했습니다. No attribution requ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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