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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실수하지 않았어야 했다

3부 - 삶을 바라보는 태도의 실패

by 박기주

점심 먹고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김 부장의 고성이 들려왔다.


“박 과장! A사에 전달한 신제품 첫 주문 수량,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


김 부장이 저렇게 흥분하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등골이 싸늘해졌다.


“잠시만요.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외투를 벗을 틈도 없이 자리에 앉아 허겁지겁 메일함을 뒤적거리는 사이 김 부장이 내 자리까지 쫓아와 몰아쳐댔다.


“내가 메일 확인했는데 수량이 이상해. 신제품 주문이 10만 박스라니, 말이 돼?!”

“아, 그런데 부장님. 10만 박스가 맞습니다. 전에 보고 드린 내년 판매 목표가 그 정도였는데요…”


“아니 이 사람아! 우리 판매 단위가 아니라 A사 판매 단위로 봐야지. 거기는 작은 박스 다섯 개 들어간 큰 박스를 한 박스로 치잖아. 전에 용어 통일하기로 다 합의해 놓고선... 실제 예측보다 다섯 배 많은데, 박 과장이 그걸 다 팔 거야?”


눈앞이 캄캄해지고, 마우스를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마침 A사에서 "정말 10만 박스로 진행하면 되겠냐"라고 물어본 것에 내가 “맞다”라고 답변한 메일을 찾아냈다. 회장님 보고 준비로 너무 정신없던 날이라 대충 답변했던 기억도 같이 떠올랐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김 부장이 내 등을 뚫을 듯 매서운 눈빛을 보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하지만 필요 대비 5배를 주문해 버린 그 실수는 도무지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불행히 내 커리어에는, 이보다 더 큰 실수도 많았다.


당시 나를 바라보는 김 부장의 표정이 딱 이랬다


회사일을 하다 보면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나만 아는 작은 실수부터 회사 전체가 아는 대형 사고까지. 나도 오랜 직장 생활 속에서 온갖 실수를 경험했다. 내가 직접 저지른 것도 있었고, 부하 직원이 낸 사고를 대신 책임져야 했던 경우도 많았다. 돌이켜보면 그 실수들은 하나같이 괴로운 일이었다.


실수는 남을 힘들게 하기에 더욱 괴롭다.


조직에서의 실수는 나 혼자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 실수 때문에 상사가 더 높은 분에게 불려 가 혼나거나, 내가 친 사고 때문에 동료들이 야근을 해야 할 때는 정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괜찮다고 어깨를 두드려주는 동료들도 있었지만, 찢긴 마음을 기워주진 못했다.


회사 전체가 난리가 날 정도의 사고를 낸 적도 있었다. 직접 실수한 건 아니지만 내가 리더로서 책임져야 하는 위치였다. 수개월 동안 많은 직원들이 사건 해결에 매달렸고 법무법인까지 고용해 가며 진을 뺐다.


그 시기에는 정말 마음이 힘든 나머지, 당시 살던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내가 지금 여기서 뛰어내리면 다 해결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본 적도 있었다.


둘째, 실수는 금요일에 더 아프다.


실수한 것이 금요일에 드러나면 그야말로 최악이다.
월요일에 터진 사건은 화·수·목 정신없이 일하며 소명과 해명, 문제 해결 미팅을 이어가다 보면 금요일 즈음엔 어느 정도 정리되곤 한다.


하지만 금요일에 터진 사고는 월요일까지 붕 떠 있다. 주말에 뭘 하려 해도 중요한 사람들이 자리에 없거나 아직 사태를 모르고 있기도 해 손 쓸 방법이 없다. 그러니 실수 직후의 주말은 감옥 같은 좌불안석의 시간이다.


놀러 나가고 싶은 마음도, 쉬고 싶은 마음도 없다. 혹시 회사에서 전화가 올까 핸드폰을 끌어안고 방에 틀어박혀 지낸다. 불안감에 잠도 잘 이루지 못해 월요일 아침에는 좀비처럼 출근한다. 로비나 엘리베이터에서 만나 인사하는 동료들조차 ‘저 사람도 소문 들었겠지’하는 생각으로 제대로 얼굴을 쳐다보기조차 어렵다.


주말 동안 실컷 '마음의 고문'을 당하다가 월요일 아침에 처형대로 끌려가는 꼴이다. 그래서 금요일에 터진 실수는 더욱 아프다.


셋째, 실수는 잘 잊히지 않는다.


실수는 금방 지나가고 모두가 잊어버리니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다. 큰 실수일수록 오래 남는다.

실수를 저지른 나도 쉬이 잊어버리지 못하지만, 혹 내가 잊는다 해도 조직은 기억한다.


얼마 전, 9년 전 내 실수를 기억하고 있는 퇴직 임원을 만났다. 그는 그 사건의 간접적인 피해자였다. “자네, 그때 그런 일 있었지”라며 허허 웃었지만, 그 기억이 그에게 좋게 남아 있을 리 없었다. 다 지나간 일이지만 나는 또다시 얼굴을 붉혀야 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평소에는 잊고 있다가 작은 단서 하나라도 주어지면 나의 실수들을 어렵지 않게 기억해 내고 나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과 평가도 같이 떠올리게 된다. 나 또한 부하 직원이나 동료들의 옛 실수가 종종 떠오르곤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럴진대, 어찌 실수가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실수는 성장의 기회다”?


이처럼 조직에서의 실수는 무서운 일이다. 그런데 많은 책과 강의가 실수를 통해 더 단단해진다고 말한다. 실수를 쌓으며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가 된다고도 한다.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실수는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실수한 당사자를 찢어놓을 듯이 괴롭히며, 오래도록 기억과 기록에 남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좋게 생각하고 이겨내자 정도의 위로라면 괜찮지만, 마치 실수가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든다는 식의 격려는 진실되지 않다.


조직에서 발생하는 실수들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조직에서 어떤 실수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이에 내가 겪은 여러 실수를 총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봤다. 의도적으로 저지르는 옳지 않은 일 (횡령, 거짓보고, 사내 불륜 등)은 제외한 순수한 실수들이다.


1. 숫자 실수
숫자를 잘못 입력하거나 단위를 착각하는 실수다. 앞서 내가 A사에 저지른 사고가 여기에 해당한다.
2018년 삼성증권 사건처럼 배당정보를 잘못 입력해 어마어마한 위조 주식이 발행되고, 여러 명이 구속되고, 금융시장 전체가 흔들린 사례도 있다. 이러한 실수는 변명의 여지도 없고, 파장이 회사 전체를 흔들 만큼 커질 수도 있다.

2. 깜빡하기 실수
지시받거나 부탁받은 일을 깡그리 잊어버리거나 중요한 납기일, 보고 일정을 놓치는 경우다. 버려서는 안 될 물건을 잃어버리고 중요 파일을 지워버리는 것도 포함된다. 너무 바쁜 순간에 업무 전달을 받거나, 지시나 부탁을 잘못 이해한 경우 흔히 발생한다. 어떤 리더들은 중요한 전달 사항을 깜빡하고 있다가 조직 전체를 혼란에 빠트리기도 한다. 이 실수는 사안에 따라 그냥 죄송하다 한 마디로 끝나기도 하고, 시말서까지 가기도 한다.


3. 보안 실수
쉽게 발생하지는 않지만 터지면 어마어마한 사건이 된다. 종종 뉴스에 나오는 회원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대표적이다. 삼성전자 직원들이 챗GPT가 처음 나왔을 때 아무 생각 없이 회사 기밀 정보를 입력하여 문제가 된 것도 이 케이스에 해당한다. 이 실수를 한 사람과 그의 상사는 높은 확률로 질책을 당하고 징계를 당하기까지 한다. 회사 내에 보안 관련 교육이 갑자기 강화되어 여러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건 덤이다. 그만큼 큰 실수이다.

4. 기술 및 커뮤니케이션 실수
의사가 수술을 잘못하거나, 엔지니어가 부품을 잘못 끼우는 것 같은 전문성의 영역에서 발생한다. 메일을 애매하게 써 상대가 오해하거나, 회의에서 설명이 불분명해 혼란을 주는 커뮤니케이션 실수도 여기에 속한다. 이 유형의 실수는 경험이 쌓이면 확연히 줄어든다. 일이 숙달되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이 그러려니 하며 이해를 해주거나 대신 막아주기 때문일 수도 있다.

5. 말실수 (특히 술자리에서의 말실수)

의도치 않게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드는 발언을 던지거나, 상사나 선배에게 불필요하게 대들고, 성차별적 발언, 비하성 농담 등을 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인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닌,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의 말실수는 대부분 술자리에서 나온다. 고객과의 식사 자리에서 만취하여 사고를 친 최 과장, 회식 자리에서 여자 직원에게 오해살만 한 발언을 해 승진에서 밀려나 급기야 지방 한직으로 발령받은 이 부장, 술기운에 후배들을 잡아놓고 밤늦게까지 훈계하다 꼰대 낙인이 찍혀 블라인드에까지 올라온 남 차장… 모두 술 때문에 곤욕을 치른 사람들이다.




실수 막기


앞에서 열거한 실수들은, 특히 1번에서부터 4번은 무엇보다 시스템으로 방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전문용어로 ‘포카 요케’라고 한다. 잘못된 행동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를 해놓는 것이다

암호를 칠 때 미리 오타를 방지해 주는 메시지를 띄우는 것도 포카 요케다

A사와의 사건도 당시에 괜찮은 주문 관리 시스템이 있었다면 예방할 수 있었다. 보안 문제나 일정 관리 등 다른 여러 실수들도 적절한 시스템이 있다면 걸러내기 쉽다.


그런 시스템이 없다면 컨펌을 도와주는 조력자를 곁에 두는 것이 좋다. 내 눈이 믿음직하지 않다면 두 번째 눈을 갖추면 된다.

난 직접 만든 자료도 반드시 부하직원에게 검증하게 하는데, 나보다 더 많은 시간 숫자를 보고 있는 직원들은 귀신같이 오류를 발견하여 사고를 방지해 준다. 동료나 부하직원을 쓸 수 없다면 상사를 써도 된다. "이번 A사 신제품 주문 건입니다. 10만 박스를 주문하려 하오니 승인 부탁 드립니다"라고 김 부장에게 메일을 던져놓았더라면 적어도 큰 사고로 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숫자 실수 외에 다른 실수들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 나와 중요한 사항을 공유하는 사람, 내 일을 확인해 주는 사람을 만들어놓으면 틈새는 크게 작아질 수 있다.


물론 5번 술자리에서의 실수만큼은 어떠한 시스템도, 어떠한 조력자도 소용이 없다. 술에 취하면 있던 시스템도 해제가 되며,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이상한 말들이 입에서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술은 가급적 가족이나 친구들과 마시고, 회사 사람들과는 최대한 줄이는 것이 방법이다.


술은 회사에서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아주 좋은 수단이지만, 그 스트레스를 회사 사람들과 풀려고 하는 것은 위험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다섯 가지 실수 유형은, 그 어떤 것도 긍정적이지 않다.

모두 나의 부족함을 드러내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 반드시 피해야 한다.

그러니 실수에 대한 달콤한 말들에 속지 말자.

실수를 함으로써 배우는 게 분명 있지만, 가급적 실수하지 않고 배울 수 있는 길로 가자.


그러기 위해선, 내가 어떤 분야에 약한지를 돌아보고, 내 실수를 막아줄 시스템을 찾아보고, 함께 컨펌을 해줄 조력자를 곁에 두자. 술자리를 조심하자. 실수를 저질렀다면 어떻게든 빨리 수습하고, 다시는 과오를 반복하지 말자.


억지로 실수가 나지 않는 업무로 갈 필요는 없다. 그런 곳은 대개 최전선에서 한발 비켜 있는 경우가 많아, 마음은 편할지 몰라도 승진의 기회가 작거나 박진감이 떨어진다. 그러니 실수가 날 수 있는 전방에서 일하되, 그곳에서 실수를 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지뢰밭이 깔린 최전방에서 복무하며 혁혁한 공을 세우되, 그저 지뢰를 밟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실수를 가볍게 여겼고, 불필요하게 여러 번 저질렀다.
그 흔적은 지금도 조직과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고

내 가슴엔 깊은 상흔으로 새겨져 있다.


이게 내가 실패한 열네 번째 이유다.


(모든 이미지는 Vecteezy.com에서 구입하였습니다. 모두 no attribution requ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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