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촌에 사는 애들하고는 어울리지 마

염세주의자의 세상 읽기

by 박김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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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2학년 재학 중일 때 일입니다. 당시 담임 선생들은 학급 어린이들에게 이런 요구를 했어요.


“집에 자가용 있는 학생 손들어 봐”

“집에 비디오 있는 학생 손들어 봐”

“부모님 맞벌이하는 학생 손들어 봐”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참으로 흔한 일이었어요.


어느 날, 우리 학급 담임 선생이 저를 불러 묻더군요.


선생 : 수진아, 너희 아빠 차 가지고 계시니?

수진 : 네.

선생 : 차종이 뭔지 알아? 자동차 이름 말이야.

수진 : 포니요.

선생 : 집에 비디오 있니?

수진 : 네.

선생 : 아빠, 사업하시니?

수진 : 네.

선생 : 엄마는 집에 계시고?

수진 : 네.

선생 : 그런데 엄마는 왜 학교에 한 번 안 오시니?

수진 : 모르겠는데요.


그 선생은 촌지를 들고 우리 엄마가 찾아오기를 기대하고 있었어요. 선생은 이런 대화를 우리가 나누었음을 제가 엄마에게 전할 거라고 계산하고 있었고요. 하지만 저는 엄마에게 그 선생과의 대화 내용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차도 있다고 하고, 비디오도 있다고 하고, 엄마는 전업주부라고 답을 하니 기대가 컸을 거예요. 위의 대화를 한 이후에 갑자기 제게 무관심했던 선생이 저를 챙기고, 따뜻한 관심을 주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 엄마가 학교에 나타나지 않자 어느 날부터인가 저를 완전히 무시하기 시작했어요. 아예 없는 학생인 것처럼 취급했어요.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사실이랍니다. 1980년대 초등학교 선생들은 대부분 촌지를 기대했고, 많은 엄마들이 선생들에게 촌지를 주었습니다. 선생들은 촌지를 넉넉하게 주는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을 노골적으로 차별 대우했어요. 막대기를 들고 다니는 남자 선생들의 경우, 촌지를 준비하지 않은 학생들만 골라서 매질을 해대기도 했어요. 물론 이유는 다양했어요. 옷이 지저분하다, 머리를 안 감았다, 콧물을 흘린다, 배꼽에 때가 끼어 있다 등.


선생들만 돈에 미쳐있던 건 아니었어요. 부모 역시 마찬가지였죠. 경제적으로 윤택한 집 부모들은 이런 방식으로 아이들의 생활을 단속했지요. “맞벌이하는 집 애들하고는 놀지 마라”, “기자촌(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에 위치)에 사는 애들하고 어울리지 마라”, “독박골(독바위골,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에 위치)에 사는 애들하고 어울리지 마라”, “그 애 부모 이혼했다더라. 어울리지 마라” 등. 부모들 역시 아이들에게 어울려 놀면 좋을 애들과 아닌 애들을 구분해서 어울리거나 어울리지 못하게 통제했어요. 그 기준이야 촌지 받던 선생들과 같죠. “돈” 말입니다.


이런 “돈” 중심의 사고방식과 생활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견고하게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같은 브랜드의 아파트 안에 임대 아파트가 있는 경우, 민간 분양 아파트 거주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등하굣길이 임대 아파트 어린이들의 등학교 길과 겹치지 않기를 원합니다. 임대 아파트 애들은 임대 아파트 애들만 다니는 길을 따로 터서 자신들의 아이들과 섞이지 않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런 상황이니 친구가 어떤 브랜드의 아파트에 거주하고, 부모님의 직업이 무엇이고, 몰고 다니는 차종이 무엇인지 등은 정말 중요한 정보죠.


아시다시피 이제는 어린이들이 더 잘 압니다. 친구가 빌라에 사는지, 아파트에 사는지, 아파트에 산다면 어느 브랜드의 아파트에 사는지, 몇 평에 사는지, 자가인지 전세인지, 부모님이 몰고 다니는 차는 국내산인지 외국산인지 등. 이런 것들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어린이들이 알아서 서로에게 묻고 확인합니다. 그리고 그 정보들을 기반으로 친구들 간의 서열과 위계를 만들어 차별합니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입에 이런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오르내리는 시대에 살고 있죠. “개근 거지”, “빌라 거지”, “전세 거지”.


모든 사고와 생활 방식이 “돈”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전개됩니다. 동시에 획일적인 교육 덕분인지 개성도 말살되는 형국입니다. “돈” 중심의 사고를 하는 존재들이 개성도 없이 성장하니 참으로 기이하고 무서운 형국입니다.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무시무시한 일들이 벌어지고는 합니다. 물론 그 바탕에는 역시 “돈”이 있습니다.


1990년대 중반에 저는 대학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모 여자대학교 앞을 걸었어요. 마침 학생들의 등교 시간이었고, 저는 정말 기괴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날의 등교 중인 학생들은 마치 기계로 찍어낸 붕어빵 같았습니다. 모두가 검은색 통바지를 입었고, 모두가 타이트한 흰색 상의를 입었으며, 검은색 통굽 구두를 신었습니다. 모두가 긴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었고, 곱창밴드로 머리를 묶었어요. 그리고 책가방! 모두가 이스트팩이라는 가방을 메고 있었습니다! 아, 왠지 이 부분도 제가 과장을 했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분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정말입니다. 저는 저런 광경을 매일 아침마다 목격하였습니다. 교복인 줄 알았습니다. 학교로부터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제받던 고등학생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괴한 현상은 언제나 있어왔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게 왜 “무섭고 기괴한 광경”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당시의 “이스트팩”은 지금의 “아이폰”이 되었습니다. “이스트팩”이 아닌 “아스트팩”은 웃음거리가 됩니다. “아이폰”이 아닌 “갤럭시폰”은 이미 “갤레기”가 된 지 오래이고요.


몇 해 전에는 롱패딩이 유행을 했습니다. 너도 나도 롱패딩을 사다 입었고, 고가의 롱패딩을 걸칠수록 자긍심이 극대화되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이제는 숏 패딩의 시대라고 합니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부담스럽지만 아이를 위해 고가의 롱패딩을 사다 입혔는데, 이제는 롱패딩을 입으면 따를 당한다고 하니 숏 패딩을 또 안 사줄 수 없는 일입니다. 내 자식이 “남들처럼” 입지 못 해 “없어 보여서” 왕따라도 당하면 어찌합니까? 그러니 “달러 빚을 내서라도” 패딩비를 다시 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모든 세대의 성인들에게 이르기까지 “돈”은 그 자체로 “절대 권력”이 된 지 오래입니다. 이 세상은 온통 “돈”에 미쳐 있습니다. 가족 안에서도, 학교 안에서도, 직장 안에서도, 사회문화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가치는 “돈”입니다. 한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 “돈”은 무지막지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내가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걸치고, 무엇을 타고, 무엇을 깔고 누웠는지가 곧 내가 됩니다. 티코를 타는 나와 벤츠를 타는 나는 달리 취급받습니다. 실제로 제게 티코 한 대와 벤츠 한 대가 있다고 합시다. 어제의 나는 티코를 탔고, 오늘의 나는 벤츠를 탔습니다. 제 입장에서야 어제의 저와 오늘의 제가 동일 인물이지만, 타인들은 동일인으로 보지 않습니다. 내가 부자이고, 부자인 것을 티를 내거나 티가 나고, 그걸 보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 사이에 내가 있다면 사람들은 나를 다정하게 대해 줍니다. 그 반대의 경우가 어떨지에 관해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경제적인 수준의 차이, 부의 수준 차이는 곧 그 사람과 저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가 됩니다. 그 차이를 발견하거나 알아차린 사람들은 그들을 결코 평등하게 보고 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저 사람은 어지간해서 엮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과 비슷한 경제적 수준의 사람들이 모인 공간에 거주하고, 그런 공간에서 식사하고, 그런 사람들과 교류합니다. 그 사람과 저 사람은 명백히 다른 사람 군이 되어 버리고, 서로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너희와 달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평가의 기준이 되는 건 당연한 게 아니냐고요? “이스트팩”이며 “아이폰”이며 “곱창밴드”며 이런 것들을 그냥 “유행”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냐고요?


네,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 아니라 자본주의 할아버지 사회라고 해도 “돈”이 “사람”을 평가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기준인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아시다시피 “사람”은 “돈”으로만 구성된, “물질”로만 구성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잘 살아보세!”라고 합창을 했어도 모두가 원하는 만큼의 부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특성상 모두가 한결같이 부자가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지금의 부는 대체로 상속됩니다. 부모의 부는 자녀에게 대물림됩니다. 공정한 경쟁은 불가능합니다. 각기 다른 출발선에 선 사람들 간의 경쟁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또한 유행으로만 보기엔 위험 요소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바로 차별에 관한 문제입니다. 빌라 거주자는 “거지”가 되고, 갤럭시폰 유저는 “쓰레기 유저”가 되고 맙니다. 부를 상속받지 못하거나, 애초에 부를 상속해 줄 부모가 존재하지 않거나, 애초에 공정한 경쟁에 참여하지 못 한 장애인 등 가난한 소수자들은 차별의 시선과 환경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맙니다. 개성이 말살된, 획일화된 집단적 욕망은 차별을 낳고, 차별을 자연스러운 결과로 간주합니다. 개성이 말살된, 획일화된 집단적 욕망의 다른 이름은 “집단적 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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