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난 순간부터 밤에 잠들기 전까지 우리는 광고의 홍수 한복판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접하는 모든 콘텐츠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타고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1층 대기 공간에서, 영화관에서, 텔레비전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광고를 접해야만 합니다.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그런 환경에 놓여 버렸습니다. 광고 속 연예인들은 우리에게 하루 종일 말을 겁니다. “이 물건을 사세요”라고요.
광고는 우리를 세뇌시킵니다. “이 물건을 사세요. 이 물건을 가지세요. 이 물건을 가지면 당신의 사회적 등급이 올라갑니다. 당신이 이 물건을 가지게 된다면 당신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광고도 “더 이상 물건을 사지 마세요. 더 이상 무엇인가를 소유하려 들지 마세요. 당신이 이 물건을 가졌다는 사실이 곧 당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뇌를 당한 우리들은 그 물건들이 나의 자존감과 행복도를 높여줄 것이라 기대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물건을 소유하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고, 소유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자학 상태로 스스로를 몰아갑니다. 우리는 내가 걸친 이 옷의 브랜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내가 든 가방의 브랜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내가 몰고 다니는 차의 브랜드와 등급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내가 사는 아파트의 브랜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생각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질 수 없을 때, 가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내려놓아야 할 때 절망하고는 맙니다. 그 물건들을 소유하지 못했으니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기업의 광고가 딱 원하는 상황입니다. 물건을 만들어 판매하는 기업들이 규정한 행복의 내용과 형식을 철저하게 따르며 사는 것이 정답이고, 최고의 지향인 사회라니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물건들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부를 성취해야 그 모든 것들 혹은 그것들의 일부라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왜 내가 그것을 소유해야 하는지, 내가 그것을 소유하지 않았을 때 왜 스스로 불행하다 여기는지 질문하지 않습니다. 질문하지 않아도 이미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들을 가지기 위해서 나는 돈을 벌어야 하고, 많이 벌어야 합니다. 내가 그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을 정도의 부를 이루는 것이 내 인생 최대의 목표이고, 그것이 바로 “성공”이라는 것입니다.
“성공”의 유일한 기준은 부의 성취 정도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성공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우리는 그런 정보를 자주 접합니다. 그들은 SNS를 통해 성공한 사람들의 수면 시간은 네 시간을 넘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수면 시간이 그렇게 짧으면 뇌질환에 쉽게 걸릴 뿐만 아니라 부족한 수면 시간은 만병의 원인 중 하나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공” 하지 않는다면 혹은 “성공” 하지 않기로 결정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저렴한 옷을 사서 입고, 차 없는 삶을 살고, 아파트가 아닌 곳에 주거 공간을 마련하거나 특정한 주거 공간 없이 생활한다면 우리는 대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내일의 성공”을 위해 돈을 벌지 않고 “오늘 하루 무탈하게 잘 살기” 위해 필요한 딱 그만큼의 돈을 벌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긴요. “없어 보이는 사람”, “가난한 부류”, “딱한 처지의 사람”, “튀는 사람”, “아웃사이더”, 그렇게 또 “소수자”가 되는 것이지요.
“소수자”가 되는 것이 두렵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은, 그럼에도 “성공” 하고 싶은 사람들은 “성공”을 추구하고 취하면 됩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모두가 원한다고 해도 모두가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그 “성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을 비정상화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공”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비하하고, 비난하고, 차별하고, 그 “성공” 이외의 성공은 무의미하다는 거짓 이데올로기를 퍼뜨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연애를 안 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제도 결혼에 편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임신, 출산, 육아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에겐 “성공”을 꿈꾸지 않을 자유란 게 있습니다.
부모가 가난하면 나도 가난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부모가 부자면 나 역시 부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여기에서의 부는 경제적인 의미입니다만, “문화자본”이라고 불리는 부 역시 대물림 됩니다. “하면 된다"라는 이데올로기가 힘을 발휘하던 시대는 이미 저물었습니다.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동일한 출발선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전혀 공정하지 않습니다. 경제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이 대물림 되는 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이 가능할리 없습니다.
장애인, 여성 등 우리 사회 소수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조치를 망설이는 불평등한 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이라는 말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부와 빈곤의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니 “성공 궤도” 밖에 있다고 하여 자책하고, 자학하는 일을 중단해야 합니다. 나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니 말입니다. 물려받은 부를 바탕으로 기고만장해진 이를 부러움이 아닌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공”의 의미를 확장시켜야 합니다. 이미 “성공”을 지향하는 삶이 아닌, 제3의 길, 제4의 길, 제5의 길을 열어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아웃사이더라 불리거나 말거나, 소수자로 낙인찍히거나 말거나 말입니다.
“성공”의 의미를 새로 써야 합니다. 경제적인, 물질적인 의미에서의 성공만이 강요되어 온 사회입니다만,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 물질적 성공을 추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경제적, 물질적인 성공이 곧 행복일 수 있겠지만, 더 많은 누군가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경제적, 물질적인 성공을 곧 행복이라 여기지 않아도 살기 좋은 세상이어야 합니다.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면서 무일푼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하라는 조언이 아닙니다. 경제적인 성공, 풀소유가 곧 행복인 세상은 매우 잘못된, 불건강한 사회라는 얘기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현재 내가 지향하고 있는 성공과 행복 개념 안에 온전하게 내 의지로 채운 것들은 얼마나 있는 것인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유도 한 번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사회적인 분위기에 이끌려 다니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체적으로 말입니다. 그런 작업을 마친 이후에 그럼에도 경제적인, 물질적인 성취를 원하고, 곧 그것이 자신을 가장 행복한 상태로 이끈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경제적인, 물질적인 성취를 향해 달려가면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성취, 성공, 행복 등의 개념을 나 스스로 기획, 새로 쓰면 됩니다. 지나치게 식상한 표현입니다만,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입니다. 타인의 생각, 기획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