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색하고, 좀스럽게

염세주의자의 세상 읽기

by 박김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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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서양 철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이분화라는 사고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인간이 있고, 저기에 자연도 있다고 보는 게 아니라, “인간인 나는 자연을 본다"라며 자연을 대상화, 타자화합니다. 앞서 소개했던 이성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죠. 인간동물에게는 이성이 있고, 비인간동물에게는 이성이 없다는 겁니다. 이런 식의 이분화의 예는 끝도 없이 열거할 수 있습니다. 대상화나 타자화가 문제인 이유는 그들이 하는 대상화나 타자화의 목적이 불순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것과 저것은 다르다"라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들은 정확하게는 “이것과 저것은 이토록 다르니 이것은 저것을 소유하고 지배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문제라는 거예요.


그들은 보는 주체를 인간으로 두고 자연을 대상화하면서 인간의 자연 정복과 지배를 정당화합니다. 인간동물의 경험, 사고, 관점에서 비인간동물의 경험, 사고, 관점을 인간동물보다 못한 것으로 치부하는 거예요. 인간동물은 말을 하지만, 비인간동물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기이한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인간동물은 인간의 말을 하는 것이고, 비인간동물은 자신들만의 언어로 말을 하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들은, 주로 남성으로만 구성된 그들은 대상화의 시선을 유지하면서 인간을 또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남성과 여성으로요. 그리하여 우월한 남성이 열등한 여성을 소유하고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의 당위를 내세웁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문제,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전문가와 비전문가 등의 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이분화는 차이를 분별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만, 불순한 목적을 가진 이분법적 사고방식과 행동은 차별, 억압, 폭력을 낳습니다. 자신들의 신만이 진정한 신이라며 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이단화하고 공격하고, 제도화된 의료 기술만이 진정한 의학이라며 전통 의학을 계승해 오던 이들을 한순간에 근본 없는 돌팔이로 만들어 불법화합니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찌들지 않고는 “전문가 집단”의 일원이 되기 어렵습니다. 누구나 학문을 갈고닦을 수 있고, 누구나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지만 그이가 해당 영역의 “전문가 집단”에 들어가 그에 적합한 “타이틀”을 얻지 못하면 대체로 그이는 돌팔이 취급을 받거나 그도 아니라면 누구로부터도 아무 관심을 받을 수조차 없습니다. 아주 가끔 이런 이름으로 칭송받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지만요. “재야의 고수”말입니다.


요새 “셰프”라는 타이틀을 달고 사는 남성 요리사들이 참 많습니다. “셰프”는 주방의 우두머리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요, “A 호텔 내 중식당 셰프 출신”임을 밝힐 때 사용 가능한 단어로 여러 명의 요리사가 있고, 그 요리사들을 대표하는 수석 요리사를 “셰프”라고 부릅니다. 그 “셰프”가 퇴직하여 작은 식당을 개업, 본인 혼자 요리를 담당하고 있는 경우에는 “셰프”가 아닌 거죠. 하지만 이는 사전적인 의미일 뿐, 대체로 남성 요리사를 “셰프”라 칭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리고 뭔가 요리사, 조리사, 조리장이라는 타이틀보다 “셰프”라는 타이틀을 써야 세련된 느낌을 주고받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요리” 하면 누가 떠올라야 맞습니까? “엄마들”, “여성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셰프”라고 하면 누가 떠오릅니까? 엄마나 여성들은 원한 바도 없는데 “부엌데기”가 되어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음식과 요리의 전문가인 그들은 “재야의 고수”는커녕 부엌을 벗어나 운전대만 잡아도 이런 소리를 듣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집에 들어가서 솥뚜껑이나 잡고 있지, 뭐 한다고 기어 나와서 운전대를 잡아!” 기가 막혀 웃음이 나고, 웃음이 날 정도로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이나 사회학 분야에서도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은 팽배해 있습니다. “전문가”가 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시도 아니야”, “그건 음악이 아니야”, “그건 철학이 아니야”, “그건 사회과학이 아니야”라고요. 그들은 제도권 속에 안착한 우리들만이 무엇이 진정한 시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있고, 왜 그것이 진정한 음악이 아닌지 평가할 수 있고, 이론과 현상의 객관성을 드러내고 증명할 수 있는 자격은 자신들에게만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냥 그들은 “꼴값을 떨고 있는 것”으로만 보입니다.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제도권 안에 안착한 그 꼴에 스스로들 적당한 값을 매기고는 “매우 인색하고 좀스럽게”(“떨다”의 사전적 의미가 이렇습니다) 구는 겁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봐요. 저것을 시라고, 음악이라고, 철학이라고, 과학이라고 인정하면 안 되잖아요. 그것들을 인정하면 자신들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니까 이건 한 마디로 자신의 안위를 지키려는 본능에 가까운 행태로 볼 수도 있습니다.


대중음악 평론가라는 사람들 중 일부는 이런 말을 참 자주 합니다. “요새 음악은 음악도 아니다”라고요. 말하자면 이문세의 노래는 음악이고, 레드벨벳의 노래는 음악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니, 그걸 왜 자기가 정합니까? 사람의 목소리로 리듬을 만들어 그 안에 어떤 경험, 마음, 생각 이런 것들을 담아 테이프든, CD든, 음원이든, 무엇으로든 내어 좋게 들을 수 있으면 다 음악 아닙니까? 아, 물론 정확하게는 “요새 음악은 진정한 음악이 아니야. 경망스러워”라는 것이겠지요. 이런 식의 이기적이고 부질없는 대조를 통해서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모두 하급으로 취급합니다. 그런데 이들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소위 서양 “클래식”을 좋아하고, 하는 사람들은 또 대중가요를 두고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클래식 계 사람들은 클래식을 하던 사람이 대중가요를 하는 일을 전혀 반기지 않습니다. 내가 시라고 생각하면서 시를 쓰면 그게 시입니다. 트로트는 저급이고, 가요는 중급이며, 클래식은 고급인 게 아닙니다. 김광석 노래는 노래이고, 뉴진스 노래는 노래가 아닌 게 아닙니다.



“에혀...요즘 것들은 고생을 몰라서 저래. 쯧쯧쯧”이라는 말, 참으로 익숙합니다. 그 어르신의 말씀은 옛날 것들만 고생을 하고, 고생을 해봐서 잘 알고, 그래서 잘 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만큼 옛날 것들이 젊은 것들보다 더 나은 존재들이라는 거예요. 아이고, 그래서 그렇게 훌륭한 분들이 이따위 세상을 만들어 놓으셨어요? 저런 말을 듣고 있자면 이렇게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기준을 자신 혹은 자신들에게만 두고 타인 혹은 타자들을 모두 대상화하면서 너보다는 내가, 너희들보다는 우리가, 저것들보다는 이것들이 더 낫고, 좋고, 훌륭하다고 하는 사고를 절대주의적 사고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절대주의적 사고란 A만이 최고인데, 그 이유는 A만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벽한, 우위의, 진실에 가까운 혹은 진실 그 자체라는 사고를 뜻합니다. 한 마디로 “나만 잘났다"라는 건데요, 그렇기 때문에 절대주의적 사고는 필연적으로 이분화와 대상화를 전제로 성립하는 것입니다. 절대주의적 사고는 언제든 차별주의적인 사고로 이어지게 되어 있고, 어떤 형태의 폭력이든 해당 폭력을 정당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적극적으로 상대주의적 사고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100개의 마을, 1000명의 사람들이 모두 숏패딩을 입고, 이스트팩을 메고, 아이폰을 들고, 이성과 소개팅을 하고, 적당한 시점에 제도결혼에 편입하고,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기계에서 찍어낸 붕어빵처럼 똑같이 살아가는 것, 너무 무섭지 않나요? 절대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 긍정하는 상대주의적 사고로 전환하여 사는 건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한 것이지요. 나는,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든, 어떤 속도로든 “나답게” 살아야 합니다. 국가와 사회에서 제시하는 삶의 모습들, 전문가나 그 집단이 요구하는 해법들을 내 삶의 절대적인 가치로 둘 이유가 없습니다. 태생적으로, 끊임없이 타인과 타자들을 향해 차별과 폭력을 일삼는 가치는 가차 없이 버려야 합니다. 버리지 않으면 남도 아프고, 나도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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