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세주의자의 세상 읽기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하지 않는다면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고요. 온 세상이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사랑하라고 하지만, 내가 원하지 않으면 안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왜들 그렇게 “성” 혹은 “성기 중심적인” 사고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사랑의 대상을 두고 이런 분류들을 합니다.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 등이요. 말하자면 사랑하는 대상의 성이 무엇인가에 따른 분류입니다. 이들 “뭔성애자”에 관한 설명의 대부분은 이런 식입니다. “동성에게 성적지향을 느끼면 동성애자이고, 이성에게 성적지향을 느끼면 이성애자다”라고요. 만일 “성적지향”을 느끼지 않으면 어찌 되는 겁니까? 그래서 무성애자라는 말도 생겼습니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그 누구에게도 “성적지향”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대방의 성이 반드시 이성이어야 성적인 관계에 관한 욕구가 생깁니다.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상대방의 성이 반드시 동성이어야 성적인 관계에 관한 욕구가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상대방의 성이 어떻든 성적인 관계에 관한 욕구가 안 생기는 거죠.
사람인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느낄 때, 그 사람의 생물학적인 성이 우선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결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도록 조작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이와 똑같은 질문입니다. 만일 세상이 이성애자로 살기를 강요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제가 늘 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성의 사람을 사랑하는지, 내가 어떤 성의 사람과 함께 살고 싶은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아마도 100% 이성애자로 살아가는 사람들 5%, 100%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사람들 5%, 나머지 90%는 그야말로 상대방의 생물학적인 성과 무관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거나 그 어떤 상대도 선택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요. “한 번 이성애자는 영원한 이성애자"라는 소리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긴 세월 살아가는 과정에서 사랑하거나 함께 하고픈 대상인 사람의 성이 이성일 때도 있고, 동성일 때도 있고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성애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하지만, 제가 보기엔 “이성애만 정상이야”라고 구분 짓고 강요하는 행태는 참으로 부자연스럽습니다. “성적 지향”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런 식의 정의와 구분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적 지향성이 있어”라는 말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성인 저 사람을 사랑하기는 하는데, 그 사람과 “섹스”라고 불리는 “성기결합”을 원하지 않을 경우엔 어찌 되는 겁니까? 동성인 저 사람을 사랑하기는 하는데, 키스든 성기결합이든을 원하지 않을 경우에 나는 대체 뭐가 되는 것이냐고요. 결혼 후 남편과 잠자리를 갖던 어떤 여성이 어느 시점부터 딱 그 관계가 싫어지면 이 여성은 어찌되는 건가요?
영문도 알 수 없게 사람으로 태어나고 보니 뭐가 이렇게 다 틀에 박힌 채로 딱딱 정해져 있는지, 아주 답답해 죽겠습니다. 모두가 혹은 대부분이 “그것”과 “그것들”을 욕망하고 있다는 건, 욕망해야 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내가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사랑할지 말지, 그 누군가의 성이 이성인지 동성인지, 그 누군가와 내가 성기결합을 하고 싶은지 아닌지, 할 건지 말건 지는 자율성을 바탕으로 하는 선택의 영역입니다. 세상에는 사람인 누군가와 나누는 사랑 노래가 넘쳐나지만 나는 사람이 아닌 꽃나무와, 길고양이들과, 산과, 바람과 나누는 사랑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와도 사랑할 수 있지만, 그 누구와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평생 그리 살 수도 있고, 살다가 이렇게도, 저렇게도 선택해가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건 “왜 사랑하지 않아?”, “왜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 “왜 사랑하는 그 사람과 결혼하지 않아?”라며 비난할 일이 아닙니다. 이건 “너는 정상이 아니야”라며 비난하고 차별할 일이 아닙니다. 2024년 현재 한국 인구가 5150만 명이 넘고, 전 세계 인구는 81억 명이 넘습니다. 이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두고 “반드시 이 길로만 걸어라” 강요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우정”은 어떨까요? 어린 시절에 저는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꿨습니다. 유안진 님이 쓰신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글을 읽은 후부터 그런 마음을 가졌어요. 늘 곁에 글 속 친구와 같은 친구가 함께 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사는 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됩니까. 안 되더라고요. 만나고 어울리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는데, 도무지 지란지교를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우정을 찾아 헤매던 시기, 타인을 원망하고 나를 원망하기를 반복하며 살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그 누구와도 지란지교를 맺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도 사고가 극단적인 편입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흑백논리에 갇혀 살았습니다. 어리석었어요. 반백년을 산 지금, 제 마음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마음입니다. 친구가 많아도 좋고, 적어도 좋고,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아요. 어차피 인생은 혼자가 아닙니까. 사랑도 우정도 다 어떤 면에서는 집착의 산물이지 않습니까.
저는 평소에 텅 빈 공간이나 텅 빈 흰색 도화지를 자주 떠올립니다. 텅 빈 이것들을 생각하면 오랜 시간 가져왔던 많은 의문들이 하나씩 정리되고 풀리는 느낌이 들어요. 이런 식입니다. 그 누구도,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 상태를 텅 빈 공간으로 두는 거예요.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쓸쓸함이나 외로움을 떠올릴 수도 있겠어요. 저는 그 텅 빈 공간을 텅 빈 공간 그대로 온전하게 보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저 텅 빈 공간이 있는 것일 뿐, 그 공간이 텅 비었다는 사실이 좋거나 나쁘다 판단하지 않는 거죠.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어떤 인연이나 이유들로 인해 그 공간이 잠시 혹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채워질 수 있어요. 공간이 비어있었기에 어떤 색을 가진 사랑이든 그 공간을 오갈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사랑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사랑이 찾아올 수 있는 것이고, 떠나갈 수 있는 것이고, 그저 그렇게 텅 비어 있는 채로 사랑에 머무는 마음 없이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우정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친구는 많을수록 좋다”거나 “친구는 한두 명이면 충분하다”거나하는 마음의 경계를 만들지 않고 사는 겁니다. 친구가 없는 경우를 두고 사람들은 “뭔가 문제가 있다"라며 또 평가를 해요. 그럼, 그 친구가 없는 당사자는 그 평가들에 연연하는 경우에 고통에 휩싸입니다. 그런데 대체 그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요. 그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상태, 내가 그것을 원하는 이유를 탐색하는 것에 연연하는 편이 낫습니다. 저는 어떤 경우에도 내가 느끼는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방향을 결정합니다. 친구가 적은 것이 혹은 없는 것이 고통이라면 친구 만들기에 적극적으로 나설 겁니다. 반대로 친구가 너무 많은 것에 혹은 우정이라는 것에 깊은 회의를 느끼는 중이라면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다 마치 사랑처럼 우정 역시 내 인생의 동반자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또 그리 살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과 우정에 있어서도, 무엇보다 내 삶에 있어서도 기본값은 “나는 혼자다”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스스로 기본값을 어디에, 무엇으로 두느냐에 따라 욕망은 변화합니다. 돈, 사랑, 우정, 건강, 행복 등 대부분의 것들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기본값을 무엇으로 두느냐에 따라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정해지기 마련입니다. 가족, 친구, 지인, 이웃 등 타인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 타인을 해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결정에 따르는 모든 것들을 기꺼이 책임 있게 감당하면서 살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