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세주의자의 세상 읽기
반려견과 함께 하는 인구가 늘면서 반려견을 가족으로 여기고 받아들이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이가 있는 집의 경우는 물론 아이가 없는 집에서도 반려견과 함께 합니다. 그분들 중 많은 경우 가족인 반려견을 “자식”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가족으로, 자식으로 삼고 받아들이는 분들인 것이지요. 그분들은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반려견 뽀삐를 사랑한다”고요. 동시에 이런 분들을 못마땅해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분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해요.
“저러니 애를 안 낳지”
애를 안 낳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경제적인 문제를 고려할 때, 출산과 육아에 자신이 없을 수 있지요. 과거와 달리 가족 공동체 위주의 사고와 문화에서 개인 위주의 사고와 문화로 전환된 것도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 외에도 UN에서는 남녀의 불평등한 가사노동 현실, 나이 든 부모를 돌봐야 하는 책임에 관한 부담, 부적절한 정부 정책 등을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출산과 육아를 원하지 않는 미국인들을 조사한 결과를 봤습니다. 2024년 7월 27일 자 서울경제 기사입니다. 이유를 물으니 응답자의 57%가 “그저 아이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다른 일들에 집중하며 살기 위해서”, “양육비를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형편”, “난임 등 의학적인 이유”가 그 뒤를 이었다고 하고요.
의식적이고도 적극적인 선택을 하며 무자녀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는 이들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반려견이나 반려묘와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준비된 이들이 적절한 루트를 통해 반려동물을 들이고 책임 있게 함께 하는 삶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개를 가족으로 들여 사랑을 나누며 살지 말지는 내 선택 영역이지, 님이 이래라저래라 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가족으로 삼고 여기면 가족인 겁니다. 내가 비인간동물의 형상인 그녀 혹은 그와의 관계를 사랑하는 관계로 삼든 말든 그건 님이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반려동물과의 삶을 선택했기 때문에 애를 안 낳는 게 아닙니다. 무엇보다 “애를 안 낳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니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그런 겁니다. 가족도 그런 겁니다. 내가 이성인 사람과 사랑을 하고 가족을 구성할지, 동성인 사람과 사랑을 하고 가족을 구성할지는 온전히 내 선택 영역입니다. 내가 사람과 사랑을 하며 살든 안 살든, 개와 사랑을 하며 살든 안 살든 그건 님이 정할 일이 아닙니다. 적정한 시기에 이성인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연애를 하고, 제도 결혼에 편입하고,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고, 한평생 결혼한 그 한 사람만을 영원히 사랑하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은 분들은 그리 살면 됩니다. 문제없습니다. 하지만 그리 살고 싶지 않은 분들은 그리 안 살면 됩니다. 문제없습니다. “낭만적 사랑 이데올로기”의 노예로 살고 싶지 않은 분들은 그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면 되고, 이런 선택을 누군가 비난한다면 가볍게 코웃음 한 번 쳐주고 적당하게 무시하면 됩니다. 내가 사는 인생이지, 그 사람이 사는 인생이 아니니까요.
제 얘기는 “낭만적 사랑 이데올로기”의 노예로 살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얘기이지 두근두근, 폭발적인 핑크빛 사랑의 감정이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사랑에 빠지는 것 말입니다. A에게 빠졌을 때, 이런 증상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A를 만나기 100미터 전은 물론 그전 날부터 심장이 터질 듯이 쿵쿵거리는 겁니다. A를 만나면 너무 좋아서 눈물이 흐르기도 하고, A와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향하기가 싫어 서로 데려다주느라 길을 계속 오가는 거죠. A와 헤어져 집에 돌아와 누우면 천장에 A의 얼굴 100만 개가 떠다니는 겁니다. A와 마주 보고 앉았는데도, 그이의 얼굴을 보며 앉아 있는데도 그이가 너무너무 보고 싶은 겁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A와는 절대로 이별할 것 같지 않고, 이별을 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는 겁니다. A와의 사랑은 영원할 거라 믿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릅니다. 이런 가요 제목들이 있지요.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 “널 사랑해”, “그대만 있다면”, “마지막 사랑”, “영원한 사랑”, “천년의 사랑” 등이요.
이런 감정, 사랑이라고 불리는 이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이 들어 죽는 그날까지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폭발적인 사랑의 감정은 정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혹은 불건강한 상태인 것 같기도 합니다. 다행인 것은 이런 폭발적인 사랑의 감정은 길어야 3년 정도 유지된다고 합니다. 아이고, 그래야 사람이 살죠. 계속 그런 폭발적인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면 그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1년 혹은 3년의 시간이 흐르면 폭발적인 사랑의 감정은 가라앉거나 사라집니다. 이 폭발적인 감정이 사라지고 나면 그 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헤어지는 건가요? 네,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폭발적인 그 감정만을 사랑이라 여기며 그 감정이 사라지면 관계를 정리하는 경우입니다. 많은 경우에는 폭발적인, 로맨틱한 사랑의 감정만이 사랑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폭발적인 감정이 사라진 후에도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핑크빛이었던 사랑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다른 여러 가지 색의 사랑이 자리 잡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녹색 사랑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파란색 사랑이 나타나는 겁니다. 가족애라고 느끼는 사람, 동지애라고 보는 사람, 여전히 사랑이라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산다는 이들도 많습니다. 서로가 함께 쌓아온 시간은 다른 빛의 사랑들을 만들어 냅니다. “자식 때문에 산다"라며 그저 책임감 하나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수개월에서 1년 혹은 3년이면 끝이 날 그 감정을, 모두가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닌 그 폭발적인 감정을 유일한 사랑의 감정으로 여기며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사랑을 하지 못했다며 자책하거나 자학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족애니 동지애니 하는 사랑의 감정을 이성 간에만, 사람 간에만 일어날 수 있는 감정으로 볼 이유도 없습니다.
갑자기 이런 가요 제목들도 떠오르는군요. “사랑은 유리 같은 것”,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이 아니리 말하지 말아요”, “가질 수 없는 너”, “금지된 사랑”, “헤어진 다음 날”,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별여행”, “슬픔 속에 그댈 지워야만 해”, “왜 하늘은”,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걸”, “천 일 동안”, “헤어지는 중”, “사랑이란 멜로는 없어”, “바빠서”, “나 혼자”, “헤어져줘서 고마워” 등등. 한때는 “널 사랑해”라고 말하던 사람들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널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 목맬 수 있다면 한 번쯤 목 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상대방이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며 떠난다면 어쩌겠습니까, 살다가 또 다른 사랑이 나타나면 이전보다는 조금 더 성숙한 마음과 태도로 사랑하면 될 테고요.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별 수 없습니다. 격정적인 사랑의 감정이 아니어도 누구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영화에서 이런 대사를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이런 사랑을 그린 러브라고 해”라고요. 그들은 전혀 사랑하지 않은 관계였는데 어떤 이유로 일정 기간 동거를 하게 되었고, 동거 후에 조금씩 친해지다가 서로 완전 사랑에 빠졌습니다. 남자 주인공은 자신들의 그런 사랑을 “그린 러브”라고 부른다고 설명하더군요. 이런 게 아니겠습니까. 빨강 사랑, 주황 사랑, 노랑 사랑, 파랑 사랑, 남색 사랑, 보라색 사랑, 무지갯빛 사랑, 무채색 사랑 등 뭐든 할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누군가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 묻고, 또 다른 누군가는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사랑의 정의는 이렇듯 다양합니다. 사랑의 정의도, 내가 하는 겁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됩니다.
원한다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