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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나비 May 14. 2024

15. 제안(1)

알바_자멸로 이끄는

밖으로 나온 남자가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건물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 유명한 빌딩에 저런 사무실이 있었다니..

방금까지 그곳에 있다 나왔음에도

새삼 믿기지가 않는 남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자는 오랜만에 마트에 들렀다.


몇 가지 사야 할 것들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고르지 않은 채

넓은 마트를 빙빙 돌고만 있는 남자다.


좀 전의 인터뷰를 다시 생각해 보니

마치 꿈을 꾼 것만 같다.


괜찮을까.

컨설팅치고는 좀.. 허술한 것 같은데.

사람들이나 사무실 분위기도 좀 그렇고..

하긴.. 내가 지금 뭘 가릴 처지는 아니지..

이 정도 조건이면 엎드려 빌어서라도 해야 할 판에..

하아.. 그래도 뭔가 찝찝한데..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며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남자다.

머릿속이 점점 더 복잡해질수록

남자의 시야도 점점 좁아진다.


마트 안의 풍경이 사라지고,

주변의 사람들이 사라지더니

결국 밀고 있던 카트마저

남자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렇게 깊은 생각에 빠진 남자와 빈카트 한대가

넓은 마트를 빙빙 돌고만 있다.




- 아니 뭐야! 눈을 제대로 뜨고 다녀야지!

어디 남의 엉덩이에 카트를 갖다..


몽유병 환자처럼 주변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마트 안을 빙빙 돌고만 있던 남자가

그만 앞에 있던 사람을 카트로 치고 말았다.


- 아…죄송합니다.


중년 여성의 날카로운 음성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 남자가

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한다.


- 아니! 뭐야 뭐야~ 여기서 다 만나네 그래!

아휴~ 괜찮아 괜찮아!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요즘에 내가 우리 아파트 아줌마들하고

그 라인댄스를 시작했더니

엉덩이가 탄탄해져 가지고

살짝만 건드려도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니까 글쎄.

아이고 내가 참 별소리를 다하네 호호호.

참. 출근은 괜찮았어?

아휴 이렇게 훤칠한데 아무렴~

그래 뭐 사러 온 거야? 야채나 과일 같은 건

아무래도 남자가 고르긴 어렵지.

내가 좀 도와줘?


숙인 고개를 아직 들지도 못하고 있는데

남자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천천히 숙였던 고개를 들며 상대를 확인한

남자의 머릿속엔

좀 전까지의 심각한 고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아무래도 다니는 마트를 바꿔야겠다는 생각만이

새롭게 남자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위이이잉


뭔가 좀 더 긴 대답을 기대하는 듯한

통장 아주머니의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는 남자에게

구세주가 등장했다.

남자는 급히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진동이 오고 있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핸드폰의 진동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남자는 지금 전화를 건 사람이

천지개발이라 하더라도,

아니 악랄한 보이스피싱 전화라 하더라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감사한 마음으로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전화를 받아주리라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 아, 저 전화가…


- 아휴 저놈의 전화는 낄 때 안 낄 때 구분도 못하고!

호호 농담이야 농담~ 어서 받아~

오늘 출근한 회사에서 온건지도 모르는데.

어여 받어 전화 끊어질라.


무엇이 농담이고 무엇이 진담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는 통장아주머니의 말에

남자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동시에 최대한 멀리

하지만 너무 도망가는 티는 나지 않게

황급히 카트를 밀며 앞으로 나갔다.


- 여보세요.


- 너무 빨리 다시 연락을 드리네요.

샤크컨설팅 박무한 팀장입니다.


다음 주까지 생각할 시간을 준다고 했었잖아..

혹시 다른 사람을 채용한 걸까.

젠장, 아까 그 자리에서 바로 하겠다고 말을 할걸..


불길한 생각이 떠오르면서

전화를 받는 남자의 목소리가 침울해진다.


- 아.. 네.. 어쩐 일로..


- 한 가지 제안을 드릴까 해서요.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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