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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나비 Aug 10. 2024

사랑할까요?

지구 2에 살고 있는 톰을 위해

입추가 지났다지만

한낮의 기온이 34도를 웃도는 이 무더위에

뜬금없이 '사랑'이라니요.

더위라도 먹은 걸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사랑할까요?'가 웬 말인가요.

'사랑'이요?


요즘 누가 '사랑'을 이야기한답니까.

설사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다 해도

요즘 누가 대놓고 '사랑'이라고 얘기한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더위를 먹은 게 분명한 것 같습니다.


'사랑할까요?'


몇 번을 다시 봐도 더위를 먹은 게 분명해 보입니다.

'사랑', 이라니..

거 참..



  



우리가 언제 죽을지를 알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과 똑같이 살아갈까요?


여기 지구와 똑같은 행성이 하나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지구 2'라고 할게요.

지구와 똑같이 생긴 이 '지구 2'에는

당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도 한 명 있다고 하죠.

'톰'이라고 할게요.

그냥 제일 먼저 생각난 이름이에요.

'톰소여의 모험'이라는 책 제목이

제일 먼저 떠올랐거든요.

'작은아씨들'이 제일 먼저 떠올랐으면

제가 좋아하는 '조'로 지었을 텐데,

조금 아쉽네요.

 

이왕 가정한 김에 ‘지구 2’에 살고 있는

당신과 똑같이 생긴 '톰'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도,

역시!

지구에 살고 있는 당신과 똑같았다고 해보죠.


단 하나.

‘지구 2’에 살고 있는,

당신과 똑같은 환경에서

당신과 똑같은 삶을 살아온

당신과 똑같이 생긴 '톰'이

단 하나 당신과 다른 점은.


'톰'은 앞으로 자신에게 남은 날들이 며칠인지를

알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났는데

그냥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겁니다.

마치 아주 옛날부터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말이죠.

'톰'은 이상해하거나 신기해하지도 않습니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톰'은 자신에게 남은 날이

15,000일(예를 들자면.)이라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럼 앞으로 '톰'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하루를, 한 달을, 일 년을.

어제처럼, 한 달 전처럼, 일 년 전처럼.

‘톰’은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톰’은 과연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삶을 살아갈까요.


여기까지 가정을 해봤으니,

시간도 조금 당겨볼게요.

시간을 당겨보는 게 뭐냐고요?


자, 눈 감으시고

거기 앞에 보이는 검은색 문을 여세요.

네 그 문이요. 맞아요.

그냥 믿고 한 번 열어보세요.


어때요? 근사하죠?

아무 빈자리나 가서 앉으시면 됩니다.

선착순이거든요.

first come, first served!


자, 이제 편히 앉아 계시면

곧 '톰'의 인생이 시작될 겁니다.

앞자리가 비어있다고 발 올리시면 안 되고요,

팝콘이랑 콜라가 맛있다고 너무 소리 내서 드셔도

안됩니다.

다른 분들의 관람에 방해가 되니까요.

팝콘이랑 콜라는 주고 그런 소릴 하냐고요?

옆을 한 번 보시겠어요?

짠~

다른 게 필요하시면 머릿속에 한 번 떠올리셨다가

옆을 보세요.

아니, 그건 안 돼요.

아무리 여기가 그런 공간이어도, 그건 안된다니까요.

지구에서도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애인을

어떻게 만들어 드려요!

핫도그, 버터구이오징어, 치킨, 피자, 맥주, 와인...

이런 걸 생각하세요.

누구예요?

'100억' 떠올리신 분! 빨리 손드세요!

안됩니다! 안 돼요!

지구에서도 벌어보신 적 없잖아요!

 

아무래도 이번 회차에는 좀 엉뚱한 분들이

많이 오신 것 같네요.

아! 이제 시작하네요.

자 모두 조용히 하시고, 그럼 시작합니다.

쉿!





어때요?

'톰'의 인생 이야기는 재밌으셨나요?

그쵸? 재밌죠?

맞아요. 저도 그 부분에서 특히 감명받았어요.

진짜 너무 멋진 선택이지 않았나요?


아! 그 부분도!

그 부분은 너무 부럽더라고요.


아니 맞장구만 치지 말고

제 생각을 좀 말해보라고요?

아휴, 참. 제가 이 '톰'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봤겠어요.

여러분이 지금 몇 회차 관람객들인지나 아세요?


흠, 뭐 그래도 그렇게 물어보셨으니

제 생각을 짧게 말씀드리자면,


에헴.


저는 늘 긴장하고, 불안해하던 ‘톰’이

안정적으로 변해가는 것이 좋았어요.

남은 날이 얼마인지 모르고 살 때는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아득바득 살더니

자신에게 남은 날이 얼마인지 알게 된 후에는

오히려 여유가 생기는 게..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톰'에게 새로 생긴 그 수많은 '사랑'들이 좋았어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침대 반을 덮고 있는 햇살을

사랑하게 되고,

공원 벤치에 앉아 마시는 커피 한 모금을

사랑하게 되고,

서점에 들러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는 선택의 시간을

사랑하게 되고,

아, 주말에 도서관을 가기 위해 자전거를 사는

‘톰’의 얼굴에도 사랑이 가득하더라고요.


영화 시작 부분에서 예전 '톰'의 인생을

빨리 감기처럼 보여줬던 거 기억나세요?

그때는 정 반대였잖아요.

나중에 올 온전한 행복을 위해

현재는 그냥 희생해야 할 시간들이었잖아요. ‘톰’에게는.

늘 자신 옆에 있는 사랑들은 모른 채 살아야 했잖아요. ‘톰’은.


이제 '지구 2'에 살고 있는 ‘톰’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겠죠.

삶은 마지막 15,000번째 날을 향해 달려가는

경주가 아니라,

15,000일을 이루는 하루하루 그 자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어때요? 편하게 잘 보셨나요?

그럼 관람료 5천 원...

에휴. 그래요. 관람료 얘기를 하면 다들 웃으면서

그렇게 제 손바닥에 하이파이브를 치고

가시더라고요.

이전 회차 관람객분들도. 그 이전 회차 관람객분들도. 그 이전의 이전 회차 관람객분들도..


그래도 이렇게 당신이 제 손바닥을 마주쳐주시는 것도 좋으네요.

따뜻하니까요.

따뜻해서 당신의 온기가 느껴지니까요.


그러니 우리,

사랑할까요?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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