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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나비 Nov 27. 2024

거인과 요정들의 첫눈 맞이

청소를 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설거지까지 끝내고 난 뒤 마지막으로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나와 첫눈이 내리는 밖을 보고 있으니 따뜻한 차가 마시고 싶어졌다.


우리 집 주방 서랍장 맨 아래 칸 구석에 보면

각종 차들을 모아놓은 작은 상자가 있다.

대부분 여행이나 출장을 갔을 때

숙소에 있던 것들을 가져와 모아놓은 것들이다.


상자에서 차들을 꺼내보았다.

우롱, 녹차, 재스민, 브랙퍼스트 얼그레이...

다양한 브랜드들의 다양한 차들 한 뭉치가 나를 반긴다.

어찌할 바를 모르며 하염없이 차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어느새 싸락눈이 함박눈으로 바뀌어 내리고 있다.


그렇게 시선은 창밖에 고정한 채

손을 뻗어 제일 먼저 잡히는 차만 하나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다시 박스 안으로 집어넣었다.

가지고 있는 텀블러 중에서 가장 큰 텀블러를 꺼내

따뜻한 물을 절반쯤 받았다.

텀블러도 헹굴 겸 처음 받은 따뜻한 물은 싱크대에

흘려버리고 티백을 텀블러 안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뜨거운 물로 텀블러를 가득 채웠다.



커다란 텀블러와 유리컵 하나를 들고

거실창 앞 테이블에 앉아있다.

텀블러에 담겨있는 뜨거운 차를 유리컵에 따랐다.

유리컵에 한 잔 가득 따르고도

차가 텀블러에 삼분의 이나 남아 있는 걸 보니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진다.


아직 차를 마시기도 전인데 벌써 기분이 좋아진다.

그윽한 향도 마음에 들고,

적당히 뜨거운 온도도 마음에 든다.

노오란 황금빛 색깔도 아주 마음에 든다.

후후 불어 한 모금 입에 머금으니

쌉싸름한 차향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입속에서 적당히 식은 차를 삼켜 내려 보내니

가슴이 따뜻해진다.

커피와는 또 다른 맛과 즐거움이다.


첫눈이 오는 날 뜨거운 차라니,

다시없을 호사다.

창밖엔 아파트 6층 높이 보다 더 큰 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이 휘청이고 있다.

긴 나뭇가지 위로 하얀 눈이 한 겹 두 겹 쌓이다 보니

나뭇가지들은 몸을 있는 대로 늘어뜨리고 있다가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눈이 쌓이면

그때까지 쌓인 눈을 털어버리며 몸을 아래위,

양옆으로 흔들어대고 있는 것이다.


눈이 펑펑 내리는 어느 날이었어.
커다란 거인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거인의 팔에는 눈이 잔뜩 쌓였지.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거인이
한쪽 팔이 저린 느낌이 들어
눈을 떠 자기 팔을 바라보았더니,
글쎄 한쪽 팔 위에 눈이 잔뜩 쌓여있지 뭐야.
거인은 얼굴을 한 번 찡그리고는
힘을 주어 팔에 쌓인 눈을 다 털어버렸어.
거인의 팔에서
폭포처럼 눈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지.
그건 마치 저 밤하늘에 떠있는
은하수가 땅 위로 내려오는 것 같았어.


네다섯 살 때의 딸아이가 내 옆에 있었다면,

그리고 나뭇가지에서 눈이 폭포처럼 쏟아져내리는 지금 이 광경을 같이 보고 있었다면.

아마,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대게 첫눈이 올 때면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하얀 눈이 쌓여 짙은 고동색과 하얀색, 이 두 가지 색만 보이기 마련인데 올해는 아직 잎들을 떨구지 못한 나무들이 많아 색들이 다채롭다.


내 활짝 핀 손바닥 보다 커다란 초록과 노란 잎들마다 윗부분 절반쯤이 눈에 쌓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잎들이 흰 모자를 쓰고 있는 것 같다.

마치 흰 모자를 쓴 노랑과 초록의 요정들이 나무마다 잔뜩 매달린 채 첫눈을 맞이하는 모습이다.


고민이 많은 요즘이지만 오늘만큼은 세상을 하얗게 뒤덮은 첫눈을 보며 행복한 생각만 하기로 했다.

팔을 흔들며 눈을 털어대는 저 거인과

흰 모자를 쓰고 춤을 추는 저 요정들과 함께.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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