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만 본 격이지.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인데 말이오.
나는 사주나 점을 본 적이 없다.
용하다는 점집이나 사주풀이집이 있으면 수소문해서라도 찾아가는 지인들도 주변에 제법 있지만 나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아주 용한 곳이 있다며 같이 가보자는 지인에게
그러자고 대답을 해놓고도 막상 구체적으로 연락이 오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피한 적도 많다.
적지 않은 복채가 아깝기도 했지만,
정말 도움이 될까 하는 불신이 기저에 깔려있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안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그건 그래서 기분이 안 좋을 것 같았고, 좋은 이야기를 듣는다 한들 정말 그렇게 이루어질까 하는 의심만 들 것 같았다.
더군다나 듣고 온 그 좋은 일들이란 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상실감을 생각해 보면..
음, 아니다. 가져보지도 않은 것에 대해서
상실감 운운 하는 건 맞지 않는 것 같으니..
뭐라고 할까. 허탈감? 그래 허탈감이 맞겠다.
잔뜩 기대하고 있다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그 허탈감을 견딜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한 해 두 해, 매년 해는 꼬박꼬박 넘어가고
한 살 두 살, 나는 정직하게 나이를 먹어가면서
간혹 '한 번 봐볼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 경우라면 대부분의 원인이 노력부족이란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경우 대부분의 해결책은 더 열심히 파보면 나아지는 경우가 많더라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언젠가부터 타인의 삶을 바라보듯 내 삶을 바라보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서다.
죽을 날이 가까워진 노년의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인생을 달관한 도사도 아니면서
본인의 삶을 이토록 관조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한들, 나의 기저에 깔린 불신과 타고난 게으름이 직접 사주나 점을 보러 찾아가게 두진 않을 것 같아서 차라리 사주, 명리학을 배워볼까도 생각해보았지만, 어설프게 한 발 잘못 들였다가 혹 머리라도 깎고 산으로 들어가게 될까 그럼 그것도 큰일이라 부러 관심을 갖지 않으려 이 옵션은 애써 멀리하는 중이다.
이렇듯 사주나 점을 본 적도 없고,
관련해서 알고 있는 지식도 없는 내가
비과학의 영역에서 맹신하고 있는 게 하나 있다.
관상이다.
아무리 내게 잘해주더라도,
아무리 남들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더라도.
내가 본 그 사람의 상이 좋지 않으면 나는 곁을 잘 내주지 않는다.
단순히 잘생기고 예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비록 세간의 평가 기준으로 못생겼다고 할지라도
사람을 끄는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무리 예쁘고 잘 생겼어도 잠시도 같이 있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세상 친절한 미소지만, 그 뒤로 난폭함과 섬뜩함이 보이는 사람이 있고
무심한 얼굴이지만, 두 눈 너머로 배려와 따뜻함이 보이는 사람도 있다.
코의 모양이, 입술의 굵기가, 이마의 넓이가, 눈동자의 색깔이.. 이런 전문적인 관상의 영역은 나는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이런 전문적인 관상의 해석을 나는 그다지 신뢰하지도 않는다.
눈이나 코, 입술, 귀의 모양이나 크기와 같은 부분들이나 그 부분들의 합을 가지고 하는 얘기보다는
일정 나이가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던 어느 대통령의 말에 더 신뢰가 간다.
살아온 흔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배려하며 살아온 얼굴과 미워하고 시기하고 증오하며 살아온 상이 어찌 같을까.
얼굴의 겉 가죽뿐만 아니라, 가죽 뒤 근육의 움직임과, 그 너머의 분위기.
이게 내가 보는 관상이다.
모 회사를 다닐 때, 친하게 지내는 후배 한 명이 어느 날 술을 한 잔 하자고 불러놓고(정말이지 치명적인 약점이다.) 다른 사람들의 관상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 선배는 어떤 사람인지를 어쩜 그렇게 잘 봐요?
- 업체 사람 만날 때 선배가 보면 정확하다던데요?
- 선배, 그럼 **선배는 어떤 사람이에요?
- 그럼 **과장님은요?
- **부장님은 나쁜 사람인 거죠?
하지만 내가 관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과 관상을 보는 나만의 조악한 방법이 있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공유해 줄 만큼의 신뢰도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안 좋게 본 사람이라고 그 사람이 모두에게 안 좋은 사람일까?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극악무도한 악인도 자기 자식을 대할 땐 누구보다 따뜻하고 자상한 사람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다분히 샤머니즘적인 나만의 관상법에 대해 너무 기대를 하거나 신뢰를 가지지 말라고 점잖게 얘기를 해주었지만 그래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남의 관상에 대해 물어보는 후배에게 나는,
그래도 너의 면상은 지금은 꽤 괜찮은 편인데,
자꾸 그렇게 남의 관상에 대해 궁금해하면
너의 관상도 급속도로 안 좋아질 것이야
라는, ‘실례실례합니다 부채도사댁이 맞나요’의 부채도사도 안 할 것 같은 허무맹랑한 멘트로 남의 관상에 관한 주제를 테이블에서 끄집어 내릴 수 있었고, 그제야 나는 마음 편하게 내가 좋아하는 음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요즘 나는 다른 사람의 관상엔 별 관심이 없다.
사실 별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관상을 볼 일이 잘 없다.
집에서 살림을 하고 애를 보는 생활을 하다 보니
만나는 외부인이라고 해봐야 편의점 아주머니나
아파트 경비아저씨가 대부분이다.
남의 얼굴을 볼 일이 잘 없어서 그런지 한 번씩 화장실 거울에 비치는 내 얼굴을 유심히 보게 된다.
욕심이 그득해 보이진 않는지,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있진 않는지,
어딘지 모르게 사나워진 건 아닌지.
그리고, 내가 글을 쓸 상인지.
어찌 글을 쓰는 관상이 따로 있을까마는,
한 번씩 며칠간 면도도 하지 않아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을 보면서
‘아, 이 정도면 베스트셀러를 몇 편을 썼을 작가의 얼굴인데’ 하며 혼자 키득거리고 있는 걸 보면
나만의 조악한 관상법도 신뢰성 제로인 맹탕임이 분명하다.
난 사람의 얼굴을 봤을 뿐,
시대의 모습을 보지 못했소.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본 격이지.
바람을 보아야 하는데.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인데 말이오.
영화 '관상' 中
*사진출처: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