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한 스푼, 수다 세 스푼 일상 와인 스토리 시즌2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갖고 있다.
브런치북 가이드를 꼼꼼히 보기 전까지는.’
– 박나비
시즌2를 7편으로 완결 지으려던 아름다운 계획은
그저 계획이었을 뿐, 브런치스토리 가이드에 따라
결국 시즌2도 이렇게 10편을 채우게 된다.
늘 글을 쓰고 나면 발행 버튼을 누르기가
망설여진다. 일상와인스토리 19편의 글을 쓰면서
단 한 번도 망설이지 않은 적이 없다.
장담하건대 지금 쓰고 있는 이 스무 번째 글도
그러하리라.
매 화, 글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몇 번을
다시 읽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고쳐본다.
그렇게 읽고 고치기를 반복하다 보면,
정말 공들여 썼던 문단이 통으로 빠질 때도 있고,
몇 번이고 고친 문장을 결국 원래의 문장으로
되돌려 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아무리 이 과정을 반복하더라도 완성된 글은
끝끝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쉽게 술술 글이 써지는 날이란 게 거의 없기도
하지만, 그렇게 술술 쓰이는 날이라고 해서
술술 써내려간 글들은 그럼 마음에 드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날에 수정이 더 많다.
(계속 술술 거리다 보니 급 술이 당기는…)
별 수 없다. 결국 항복이다.
이것보다 더 잘 쓸 수 있지만, 이번 편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자고 적당히 타협을 한다.
그리고 가장 쉬운 선택을 한 자책감을 희석시키고자
다음 편은 완벽하게 쓰리란 다짐을 항복 문서 저기
구석에 슬쩍 덧붙이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다음편도 항복을 외치며 또다시 타협을 할 거란 걸.
어쨌든 뭐라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뭐라도 써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단순한 명제를 떠올리며 오늘도 한 글자 한 글자
키보드를 타이핑해 본다.
물론 백스페이스 키를 가장 많이 누르고 있긴
하지만…
10편을 못 채워서 쓰는 모자란 3편의 마지막
3편이자, 일상와인스토리 시즌2의 마지막 10화
드디어 시작.
제20화. 와인을 마시는 우리가 고급입니다.
몇 년간 와인을 주종으로 마시면서
마치 게임을 하듯 와인을 ‘시작~종료’ 하는 분들을
꽤 많이 봐왔다.
하루, 이틀 와인을 접하는 날들이 늘면 자연스레
픽(pick)하는 와인의 가격대가 점점 올라간다.
냄비 속 찬물에 개구리를 넣어 두고 서서히 물을
데우다 보면 결국 죽는 줄도 모르고
유유히 헤엄치다 익어가는 것처럼,
구매하는 와인의 가격에 대해 무감각하게 지내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즐겁게 와인을 즐기던
처음의 나는 너무 익어 죽어버렸음을 깨닫게 된다.
만 원대 와인을 마시다 보면
어느 날부터 이만 원대 와인을 서성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삼만 원대, 오만 원대까지 올라가는 건
순식간이다. 더구나 이 수준에선 그렇게 크게
부담스럽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자기 자신에게 리밋을 걸어
두지 않으면 즐거운 와인 생활과는 머지않아
안녕이다. 영원히.
두 번 먹을 거 한 번으로 줄이고
대신 조금 더 비싼 와인을 먹어보자라는
자기 합리화도 이때는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이 다짐이
유지가 될 리 없다.
결국 빈도는 그대로이고 구매하는 와인의 평균값만
높아질 뿐이다. 그래서 이런 과정이 몇 번만 지나면,
정말 되돌릴 수 없게 된다.
만 원에서 이만 원, 오만 원, 그렇게 십만 원으로…
이렇게 가다 보면 이제 다음 순으로는
‘이게 그렇게 맛있다던데’가 나오면서
이십만 원 대도 한 번 사보고,
‘특별한 연도를 기념해서 그 빈티지 한 병 정도는
다들 소장하던데’하면서 칠십만 원 대도 과감히
한번 사보고…
이제 매장에 가서 저렴한 와인을 사면 왠지
판매하시는 분들이나 구경하는 다른 손님들에게
수준 낮은 사람으로 보일 것 같다.
그래서 그쪽으로는 아예 눈길도 주지 않는다.
이제 데일리로 5~10만 원 정도의 와인은 먹어줘야
될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와인들을 마시는 사진들을
SNS에 올리며 #데일리와인 이라고 해시태그를
붙이기 시작한다.
가끔 수십만 원 이상 고가의 와인을 마시는 사진도
올리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팔로워들의 좋아요와 부러워하는 댓글에 카드값
걱정은 이미 저 멀리로 사라진 지 오래다.
나, 이 정도 와인을 마시는 사람이야.
셀러가 포켓몬도 아닌데 진화하기 시작한다.
없던 셀러가 6병짜리 미니 셀러로,
6병짜리가 12병짜리로.
그렇게 80병, 150병 대형 셀러로 진화한다.
레드, 화이트에서 샴페인으로 빠지게 되고,
수 십만 원짜리 샴페인을 몇 병이나 셀러에
모셔 두고도 면세점 갈 일만 생기면
또 수 십만 원짜리 샴페인을 사 와서 쟁여 둔다.
그렇게 게임에서 레벨업을 하며 퀘스트를 깨듯
와인을 마시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세속의 와인
생활을 접고 우화등선하게 된다.
가끔 와인을 즐겨 마신다고 하면,
내가 한때는 와인의 끝을 바라봤었지 하는
아련한 표정을 지으시며 요상한 멘트를 날리시는
분들이 있는데 바로 이 분들이 이렇게 우화등선하신
분들이다.
이 우화등선하신 분들의 단골 멘트로는,
“ㅇㅇ와인 먹어봤어요?”
“그럼 ㅇㅇ와인은 먹어봤죠?”
“ㅇㅇ 와인도 안 먹어봤다고요?
아 그럼 어디 가서 와인 먹는다고 하면 안 되는데.”
“와인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내가 지금까지
와인에 쓴 돈만 벤츠 한 대는 넘을 거예요.”
“아오, 그건 쓰레기예요. 그런 건 바로 싱크대행인데.”
뭐 이외에도 굉장히 많지만 이런 류의 멘트들이
주요 기출 멘트들이다.
단언컨대 와인을 잘못 배운 분들이다.
와인을 잘 배우신 분들은 절대로 저런 식으로
우화등선하지도 않을뿐더러,
저런 멘트를 출제하지도 않는다.
같은 취미를 즐기는 동반자를 만난 반가움만
표현하지, 마시는 와인의 수준에 대해 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벤츠가 더 좋은 걸 몰라서 안타는 게 아니다.
강남이 더 좋은 걸 몰라서 다른 곳에 사는 게 아니다.
안 타보고 안 살아봐도 벤츠가, 강남이 더 좋다는 건
우리 모두 너무 잘 알고 있다.
와인도 마찬가지.
아무렴 만 원짜리 와인보다 십만 원짜리 와인이
더 맛있을 거란 사실은 안 마셔봐도 누구나 알고
있다.
그 ‘더 맛있다는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개인의
차이가 있을 뿐.
자동차나 집에 비해 가격 단위가 작아 와인은
괜찮겠지 하는 생각으로 분별없이 따라가다 보면
카푸어, 하우스푸어처럼 와인푸어가 될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 그리고 그 끝은 우화등선이다.
그러니 늘상 하는 말이지만,
오늘도 역시나 당부드린다.
와인의 본질은 술이다.
적어도 2004년 8월 이전 로또 당첨자(요즘 로또
당첨으로는…) 정도의 재력이 아니라면,
반드시 리밋을 정해 놓도록 하자.
방법론은 시즌1의 제8화 ‘당신의 와겔지수는?’을
참고하는 것도 좋겠다.
이런 깨알 홍보..
와인이 고급인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와인을 마시는 우리가 고급인 게 중요하다.
결국 이 한 마디면 될 내용을 참 길게도 늘려 썼다.
이게 다 행복한 와인 생활을 당신과 함께 오래오래
같이 해 먹고 싶은 마음에서 그런 것이니,
어여삐 봐주시길.
그럼 오늘도 당시의 행복한 와인 생활을 기원드리며
이만. 총총.
시즌3에서 다시 만나요~♥
* 그럼 이렇게 잔소리를 해대는 박나비씨의
셀러에는 어떤 와인들로 채워져 있나요?
가감 없이 지금 제 셀러에 있는 와인 전부입니다.
문득 셀러의 와인을 다 꺼내 오픈하고 보니
적잖이 실망하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그 실망의 이유가 두 종류로 나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몇몇 분들은 1~2만 원대 와인만 마신다고 하더니
사진에 있는 대부분의 와인들이 그보다
비싼 와인들이라는 점에서 실망하실 수도 있겠고,
또 반대로 몇몇 분들은 그래도 명색이 와인에 대한
글을 쓴다는 사람의 셀러에 있는 와인들이 고작
저런 수준이라면, 그 주인이 쓰는 글의 수준도
알만하다며 실망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셀러를 오픈하는 것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란 걸 알면서 저는 굳이 왜 오픈했을까요. 누가 칼 들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후회가 되네요.
제가 셀러를 오픈한 이유는 이 글의 마지막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진의 와인들을 간략하게 설명드리자면,
일단 저 와인들 대부분은 제가 데일리로 마시는
와인들은 아닙니다.
데일리로 마시는 와인의 경우,
저는 그때그때 한 두병을 사서 마시는 편입니다.
물론, 데일리로 마시는 와인들이 행사를 하게 되면
박스째 쟁여 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진상으론, 우측 3병 정도가 데일리에 해당됩니다.
엄밀히 얘기하면 우측 2번째, 골든버블은 거의 제가
마시는 경우는 드물고(시즌2, 14화에서 붕어빵을
페어링 해서 먹은 적이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제14화로~ 또 이런 깨알홍보를…) 주로 술을 잘
못 드시는 분들과의 자리에서 마시는 용도이니,
제일 우측의 ‘L와인’과 우측 3번째의 ‘요리오’
정도가 데일리에 해당되겠네요.
‘L와인’은 이번에 L마트에서 특가로 3,950원에
판매했습니다. 저는 멜롯보다는 까베르네쇼비뇽이
괜찮아서, 몇 병 사서 마셨습니다.
이제 한 병 남았네요.
‘요리오’도 이만 원 언더의 행사가(상시가 3~4만 원대) 일 때 구매해서 마시는 편입니다.
나머지 와인들은 주로 선물용이거나 모임에 들고
가는 용도의 와인들입니다.
좌측 두 번째부터 같은 종류의 와인 4병,
‘트라피체 핀카 암브로시아'는 아르헨티나
말벡입니다. 상시가 5만 원대 말벡에서는
군계일학의 느낌입니다. 이번에 행사가 3만 원
후반대로 나와 4병 쟁여 두었습니다.
매일 한 병 정도는 따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만
아직까지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4병 그대로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지켜질지는 확신할 수….
왼쪽부터 6번째, 7번째의 두 와인 ‘이니스프리’와
‘캔달잭슨’은 둘 다 미국, 까베르네쇼비뇽입니다.
2016 빈티지는 마트에서 보기 쉽지 않은데,
마음씨 좋은 지인에게 선물 받았습니다.
둘 다 정말 맛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개개의 와인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풀어보겠습니다.)
그다음 ‘우나니메’도 아르헨티나 와인인데,
블렌딩입니다. 역시, 맛있다는 말 밖에…
아! 그 옆의 ‘뿌삐유’는 반가우시죠?
시즌1의 제9화 ‘미드나잇 인 서울’에서
제 영화 메이트로 소개드린 적이 있습니다.
여기까지의 와인들은 대부분 상시가 5~6만 원대,
행사가 3~4만 원대의 와인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일 좌측의 ‘케이머스’는 사연이
좀 있는 와인입니다.
지금 저 와인들 중에서는 가장 비싼 몸값의
와인으로 10만 원 초반대입니다.
제 돈으로 10만 원 이상 가격대의 와인을 구매하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한때 좀 으스대고 싶어 조금 고가의 와인을
사마셔 보기도 했지만… 제 수준에서는 과하다는
결론을 내린 뒤로 정말 고마운 분께 선물로 드리는
경우가 아니면 거의 이 가격대부터는 일부러 잘
보지 않습니다.
사족이지만, ‘케이머스’ 와인이 많이 유명해지면서
가격 거품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거의 비슷한 수준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10만 원 언더의 비교적 덜 알려진 미국와인들이
많다고 합니다.
‘케이머스’ 정도의 미국 와인을 구매하실 경우,
샵의 판매원분이 미국 와인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이라면 추천 받아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제 셀러에 있는 와인들을 간략하게
소개드리는 것을 끝으로 일상 와인 스토리 시즌2는
마무리하겠습니다.
당신의 지속 가능한 즐거운 와인 생활을 위해,
모임용의 와인들은 행사 때를 노려 여기저기서
추천하는 와인들로 몇 병 쟁여 두시고,
데일리 와인은 가벼운 라인에서 그때그때 다양하게
즐겨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 충분히 감당하실 수 있는 선에서 행복하게
와인 생활을 즐기시는 분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1도 없으니, 다소 언짢으신 내용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양해 부탁드립니다.
와인을 즐기는 방식에 대한 견해도 다 다를 수
있으니 저와 반대의 와인 철학을 가지셨더라도
당연히 그 이유가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글의 재미를 위해 제 철학을 강하게 표현했을 뿐
다른 의견들도 모두 존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