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그 아빠랑 고기 먹을 때 딱이다!

와인 한 스푼, 수다 세 스푼 일상 와인 스토리 시즌2

by 박나비

“아빠 왜 그렇게 웃고 있어?”

하교길에 초딩 동거인의 꼬임에 넘어가

젤리를 사러 들른 편의점이다.

아이가 젤리를 고르는 동안 잠시 무언가를 보며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나 보다.


“어휴 아빠 술이 그렇게 좋아?”

아니.라는 대답을 할 시간도 주지 않고 다시 과자

코너로 돌아가는 녀석을 보며 따라가서 해명을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내가 와인 매대 앞에 서있단 걸 기억하고는

이내 단념한다. 틀린 얘기는 아니니까.


다시 보고 있던 곳으로 눈을 돌린다.

언제 봐도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문득 계속 이러고 있으면 또 한 소리를 들을 것

같은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초딩 동거인이 있는

과자 코너로 발을 옮긴다.


나에게는 병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와인이 딱 하나 있다.

오늘은 그 와인에 대한 이야기다.

그게 어떤 와인이냐면…


'와인의 세계에 이제 막 발을 내딛으려는

당신을 위한 고품격 와인 스토리'라고 쓰고,

'와인 한 스푼에 수다 세 스푼의 믹스커피 같은

와인 이야기'라고 읽는 일상와인 스토리 시즌2,

제19화, 시작




제19화. 느그 아빠랑 고기 먹을 때 딱이다!


나에겐 병의 라벨만 봐도 행복해지는 와인이

딱 하나 있다.

물론, 어떤 와인을 대하더라도 기분이 좋은 나지만

지금 얘기하는 이 와인은 아주 특별하다.


라벨이 이쁜 것도 아니고, 가격이 비싼 것도 아니다.

비싸진 않더라도 꽤 멋진 풍미를 제공하는 그런

가성비 와인도 아니다.

결정적으로 나는 이 와인을 마셔본 적이

딱 한 번 밖에 없다. 아, 그럼 이 와인이 구하기가

그렇게 힘든 와인이냐면... 그것도 아니다.

이렇게 젤리 사러 들른 편의점에서도 볼 수 있는

무척이나 대중적인 와인이다.


라벨이 특이해서 시선을 끄는 것도 아니고,

가격이 비싼 와인도 아니며,

그렇다고 시중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귀한

와인도 아닌데 딱 한 번만 맛을 본 와인이라…




‘진로 하우스 와인’

마트나 편의점에서 이천 원대에 판매하는

'진로 하우스 와인'은 스페인산 레드 와인 원액을

희석한 다음 달달한 맛과 향을 위해

설탕, 액상과당, 포도향 등을 첨가하여 만든다.


사실 와인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다.

아니 이런 와인을 지금 라벨만 봐도 행복해지는

특별한 와인이라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오 박나비씨!


언젠가 본가에서 낮잠을 실컷 자고 일어나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이 와인을 처음 봤다.

이 집에 술 먹는 사람이 없는데 웬 술이...

일반 와인 병 치고는 작은 500ml 용량의 병을 들고

신기한 듯 요리조리 살펴보는데,

그 모습을 엄마가 보시고는 한 마디 하신다.


“왜? 한 잔 줄까?”


“아휴 난 이런 거 안 먹지.

입이 고급이라 이런 거 안 먹어”


라고 대답을 하면서도 이미 내 손은 뚜껑을 열어

물컵에 따르고 있다.

딱 상상했던 그 맛이다. 달달한 포도주스 맛에

섞여 들어오는 저렴한 알코올의 맛.


“아휴, 이걸 뭔 맛으로 먹는데. 다음에 맛있는 거

한 병 갖다 줄게. 이거 마시지 마요.”


인상을 찌푸리며 도로 뚜껑을 닫아 냉장고에

넣어두는 나를 보며 엄마는 다시 한 마디를 남기고

안방으로 총총히 들어가신다.


“만다꼬, 그거 맛있다. 느그 아빠랑 고기 먹을 때

한 잔씩 하면 딱이다.”




그 뒤로 가끔 마트나 편의점에서 이 와인을 볼 때

마다 엄마,아빠의 소박한 저녁 밥상이 떠오른다.


프라이팬 위에 노릇노릇 잘 익은 삼겹살과

물기를 탈탈 털어 채반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상추가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작은 종지에 담긴 쌈장과

양이 적은 두 분이라 종지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두 분의 작은 밥그릇.

거기에 반짝이는 미니 크리스털 잔에 담긴

진로 하우스 와인 한 잔씩이 곁들여진

노부부의 소박한 저녁 밥상.


그 밥상을 사이에 두고,

오늘 날씨 얘기에서부터 친구 아들이 늦둥이 딸을

낳은 소식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고 가리라.

그 다양한 이야기들이 한 템포 숨을 쉴 때면

그제야 두 분은 고기쌈을 한 쌈 싸서 입 안에 넣고,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서로 짠 하고 부딪히리라.

건배를 마친 잔을 가져와 거의 입술만 적시고는

이내 잔을 내려놓으리라.

그리고 다시 밥상위로 노부부의 일상의 이야기들이

오고 가리라.


“화장실에 샤워기가 시원찮은 거 같은데,

저녁 먹고 한 번 봐보이소”

“알았다.”


“내일 병원 가는 날인 거 안 까먹었지요?

단디 입고 다녀오이소”

“알았다.”


“부동산에서 주말에 집 보러 온다고 하던데,

베란다 좀 치워 놓으소”

“알았다.”


수다쟁이 엄마와 엄마의 그 어떤 질문에도

단답형으로 대답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아빠의 대화 장면은 애써 상상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그려진다.


술을 거의 못 드시는 엄마와 술을 거의 안 드시는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술을 고래처럼 마시는

아들에게 이런 두 분의 모습은 소꿉장난을 하는

것처럼 귀엽고 예쁘다.


앞으로도 두 분의 소박한 저녁상에

2,500원짜리 ‘진로 하우스 와인’과 반짝이는

미니 크리스털 잔이 오래오래 함께 하기를.

그리고 그 저녁상 위를 오고가는 두 분의 일상은

소소함으로 그득하기를.


하교길에 들른 편의점에서

초딩은 마음에 드는 젤리를,

나는 훈훈한 온기 한아름을 마음속에 품고 나온다.

젤리는 2,000원, 온기 한아름은 덤으로.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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