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한 스푼, 수다 세 스푼 일상 와인 스토리 시즌2
17화를 끝으로 ‘일상와인스토리 시즌2’를
마무리하려던 아름다운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브런치스토리의 시스템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어리석은 초보 브런치 유저,
불쌍한 박나비씨.
이 상태론 ‘일상와인스토리 시즌2’는
브런치북으로 안 만들어진다. 털썩. 하아…
정독 시간 분량만 생각을 했지,
최소 편 수 생각을 못한 것이다.
브런치북은 한 편의 분량이 얼마만큼 인지 상관없이
최소 10편의 글이 있어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아름답게 마무리한 시즌2는
제11화부터 제17화까지 총 7편이다.
이런 까닭에 가냘픈 미소년에게 어울리는
핑크 캐모마일 릴렉서를 홀짝이며 남은 세 편을
어떤 내용으로 채울지 고민 중이다.
달달한 차를 마시면 분명 쓸 내용이 머릿속에
짠~하고 마법처럼 나타나겠지.
나타날 거야. 나타나고말고.
나타.. 날거니..?
거의 다 마셔가는데…
별 수 없다. 머릿속을 휘저어서라도 글감을 하나
뽑아보자.
어디 보자…아.. 안돼…그 이야긴 절대로 안되고.
너는 더 아니야, 너는 앞으로 평생 내 기억에서
떠올려지지 마라!
너도!! 다시 기어들어가라 좋게 말로 할 때.
글감 하나 찾겠다고 기억 속을 뒤적이는데
뭐 이리 흑역사들만 잔뜩 튀어나오는지.
15화의 제목처럼 이것들도 다 디캔팅이 되면
좋으련만...
이러다 얌전히 기억 저 너머에서 잘 자고 있던
부끄러운 애들을 다 깨워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아, 그래. 이거 괜찮겠다. 맞아. 이런 일이 있었지.
무슨 얘기냐면, 때는 바야흐로…
'와인의 세계에 이제 막 발을 내딛으려는
당신을 위한 고품격 와인 스토리'라고 쓰고,
'와인 한 스푼에 수다 세 스푼의 믹스커피 같은
와인 이야기'라고 읽는 일상와인 스토리 시즌2,
따뜻한 핑크 캐모마일 릴렉서를 홀짝이며
제18화, 시작
제18화. 부처화 함께 회식을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에서 열심히 마케팅을
하고 있을 때였으니, 십 년도 훨씬 전이었던 것 같다.
그날도 열심히 동기들과 매점에서 땡땡이치고
수다를 떨며 K-직장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있는데 영업팀의 B선배가 나를 찾는다.
“나비야, 오늘 영업팀 저녁에 회식 있으니까
6시까지 마무리하고 따라와”
“넵”
‘아니 제가 왜 영업팀 회식을? 그리고 장소는 어디?
무엇보다 오늘 저녁 회식을 오늘 오후에 얘기를
하시면 미리 잡혀 있는 저의 오늘 저녁 일정은
어떻게?’
이 모든 의미를 저 ‘넵’이라는 한 글자에 담아
거칠게 항의를 해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B선배의
만족스러운 웃음뿐이다.
해외 마컴(Marketing Communications)
담당자인 내가 영업팀의 회식에 낄 이유는
딱히 없지만, 그렇다고 끼지 못할 이유도 딱히 없다. 하는 일이 영업과 상품기획, 개발 부서들과
다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 연관(聯關)
: 영업팀에도 치이고 상품기획팀에도 치이고,
어이쿠 안보였어요 하면서 저 멀리서 개발팀도
악셀 풀로 밟고 와서 치고 가는 그런 아름다운 관계
- 네이버 어학사전과 전혀 상관없음
아, 6시가 얼마 남지 않았다.
슬슬 업무를 정리해 보자.
‘물고기 잡으러 횟집에 갈까요?
소고기 잡으러 숯불을 피울까요?
내 배에 가득히 넣어가지고서
랄랄랄랄 랄랄랄라 집으로~’
흥겨운 회식송을 흥얼거리며 정리를 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K과장의 발길이 내 자리 옆에서 멈춘다.
“나비씨, 뭐 좋은 일 있나 봐?”
“아휴, 좋은 일은요. 영업팀 회식 참석하라고 좀전에
갑자기 통보받고 지금 업무 정리하느라 정신 하나도
없어요.”
“아 그래? 그런 사람치곤 얼굴이 너무 밝은데.
콧노래도 들리는 거 같던데…”
말꼬리를 끌며 씨익 웃음을 지어 보이곤 다시 저
멀리 상무님 방으로 총총이 사라지는 K과장이다.
하여튼 눈치는 빨라가지고.
사실 나는 회식을 싫어하지 않는다.
엄밀히 얘기하면 좋아하는 편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고기나 회도 많이 먹고,
더 좋아하는 술도 많이 마시고,
취한 김에 평소 불만도 나불댈 수 있…
이봐요 김부장님! 왜 결제 빨리 안 해주냐고!
내가 어? 상무님하고 사우나도 하고 어?
밥도 먹고 어? 다했어!
K-직장인 여러분, 회식자리에서 술 취했다고
아무 말이나 막 하시면 절대로 안됩니다.
과음은 슬기로운 직장 생활에 해롭습니다.
부디, 자중하세요.
오늘은 기필코 말 없이 술과 음식만 열심히
탐하리라 단단히 마음 먹고 퇴근에 필요한
업무 정리를 계속한다.
이건…아, 이건 내일 해도 되는 거고,
이건… 그래 이것도 내일 하자.
아, 이건 오늘까지 보냈어야 되는 건데…
뭐, 내일 보내도 되겠지.
뭐야 오늘도 엄청 열심히 일했네.
어쩐지 피곤하더라.
책상 위를 깨끗이 정리하지 않고,
컴퓨터의 전원은 끄지 않는다.
누가 언제 보더라도 좀 전까지 일하고 있었던 것
같은 흔적을 만들어 놓는다.
언제라도 커피 한 잔 들고 당당하게 자리에
앉았을 때 ‘아, 박나비는 잠시 자리를 비운 거였구나’
와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포인트다.
내가 그래서 회사에는 가방도 들고 다니지 않는다.
아무튼 이렇게 보람찬 하루일을 끝내 놓고서
보무도 당당히 영업팀의 회식에 합류한다.
선배와 함께 걸어가다 보니,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고깃집이 오늘의 회식 장소다.
그래, 오늘은 질 좋은 한우로 단백질 보충이나
제대로 해보자.
아 그런데 그냥 회식은 아닌 모양이다.
못 보던 외국인 2명이 보인다. 뭐지. 찝찝한데…
그제야 유럽쪽 유통 바이어들이라고 알려주는
B선배다.
아… 회식 아니었구나… 접대 자리구나…하아
엉덩이를 자리에 붙이자마자
열심히 소맥을 제조한다.
오늘따라 영롱하게 잘 제조된 소맥 두 잔을
벽안의 두 분에게 건넨다.
하지만 건네는 손이 부끄럽게 두 손으로 손사래
치며 나의 영롱한 소맥을 거절하는
두 코쟁이 사람이다.
어라. 이런 장면은 한 번도 예상 못했는데.
선배가 귀에 한 손을 대고 알려준다.
‘쟤들 와인만 먹어.’
아니, 한국에 왔으면 한국의 전통주 소맥을
먹어야지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지.
‘얘네 한국 처음이에요?’
나도 선배 귀에 한 손을 대고 물어본다.
‘아니, 졸라 많이 왔는데 소주 한 번 마셔보더니
그 뒤로 절대 안 마시더라.’
다행히 고급 소고기 식당엔 와인을 판매하고
있었고, 벽안의 두 분은 메뉴판의 와인을 보며
상의하더니 유창한 영어로 와인 주문을 한다.
부럽다.
출장으로 다져진 나의 고품격 서바이벌 잉글리시로
이것저것 심심하지 않게 말을 주고받으며 한 잔
한 잔 원샷으로 달리다 보니,
어느새 한국팀은 소맥으로 장렬히 전사 중이고,
스웨덴팀은 2명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선방 중이다.
안에선 피 터지게 싸우더라도 우리가 또 해외랑
붙으면 한국인의 매운맛을 톡톡히 보여주지.
소맥을 먹던 잔에 와인을 한가득 따른다.
이미 흥에 겨운 외국인 두 분이 화려한 추임새를
넣어 준다.
멋지게 원샷으로 잔을 비우자 물개 박수를 치며
와우, 원더풀, 퍼펙트, 핸섬맨, 뷰리풀…
갖은 감탄사를 동원하며 나의 눈을 피하고 있는
둘의 잔에 와인을 가득 따른다.
뭐, 그럼 나만 마시고 죽을 줄 알았냐.
이게 바로 K-직장인의 주도(酒道)다!
망설이다 곧 원샷으로 잔을 비우는 그들에게
이미 정신을 반쯤 잃은 한국팀도 열심히 박수를
쳐주며, 그 밤 그렇게 우리는 동서양의 화합을
이루며 모두가 장렬히 전사하기 시작했다.
3차 같은 1차를 끝내고 고깃집을 나온 한국팀과
스웨덴팀은 위아더월드, 이미 제정신이 아닌 채로
모두가 하나다.
이제 집에 가나 싶어 택시를 어떻게 잡을까
고민 중인데, B선배가 다가온다.
“노래방 가야 돼”
“네? 소주도 안 먹는 애들이 노래방은 가요?”
“어, 쟤들 노래방 완전 좋아해. 목쉴 때까지 불러.
올 때마다 코스다 아주.”
잠시 뒤,
벽안의 외국인 두 명과 예닐곱의 한국인들이
노래방의 가장 큰 룸에 사이좋게 옹기종기 앉아있다.
소주와 맥주, 마른안주를 시키고 마이크를 누구에게
먼저 돌려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는데 선배가
툭 치더니 밖으로 나간다.
추운 겨울,
B선배와 나는 근처 대형마트로 걸어가고 있다.
“아니 이 새끼들 노래방에서도 와인만 마셔요?
기본적으로 예의가 없네. 아니, 한국에 왔으면,
노래방에서는 소맥 먹어줘야지,
하아. 아니 그래서 지금 마트에 와인 사러 가요?”
아무 말 없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걸어가는 B선배의 얼굴이 유독 피곤해 보인다.
에휴… 그래 이러라고 월급 주는 거지 뭐.
쫄래쫄래 선배를 따라 마트로 들어와선
와인 구경을 한다.
우와, 이게 얼마야. 우와, 저건 더 비싸네.
즐겨 먹는 소주 가격의 몇 배, 몇 십배의 가격 태그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적당히 몇 만 원짜리 와인 두 병을 고른 B선배가
잠시 들고 있으라더니 어딘가로 사라진다.
잠시 후 다시 온 B선배의 손엔 와인 잔 2개가
곱게 들려 있다.
“와인잔도 사요? 미친…”
역시나 아무 말 없이 해탈한 부처님처럼 염화미소를
짓고 있는 B선배다.
영업은 정말 아무나 못하겠구나.
와인병과 와인잔을 들고 계산대로 걸어가는
B선배의 등이 그날따라 유독 쓸쓸해 보인다.
“선배!”
갑작스러운 나의 부름에 선배가 뒤를 돌아본다.
아, 이 말을 할까 말까…
에이, 그래 안 하고 후회하지 말고, 하자.
“선배! 그래도 따라와 줬는데…
메로나 하나만 사줘요.”
순간, 술병과 술잔을 들고 계산대 앞에 서있던
B선배의 두 다리가 휘청거린 건 착각이었을까.
"어, 눈 온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마트를 나오는데,
눈이 내린다.
두 팔을 활짝 펴고 얼굴을 하늘로 향한 채
내리는 눈을 온 얼굴로 맞는다.
두 팔을 펴고 넘어질 듯 위태롭게 빙빙 돌고 있는
나를 보고 부처 같은 B선배가 결국 한마디 한다.
"야, 와인 조심해!"
그렇게 눈 내리는 겨울 어느 밤,
선배 따라 간 마트에서 나는 아이스크림 하나를
얻어먹으며 와인병이 든 종이봉투를 앞뒤로 힘차게
흔들며 갈지자로 걷고 있었고,
그런 내 옆에는 부처 한 분이 봉투 바닥 뜯어져서
와인 다 쏟아지겠다며 계속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그때는 상상도 못 했지.
내가 이렇게 와인을 좋아하게 될거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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