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깊이
떠난다는 말은 언제나 중의적이다. 그것은 애정이 담긴 익숙한 곳을 떠나는 작별의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 마음이 향하는 미지의 세계로의 출발을 뜻하기도 한다. 마치 여행의 준비를 마친 순간, 내가 떠나는 것은 단순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을 위한 첫 발걸음이다. 우린 항상 어딘가를 떠나고 어딘가로 떠난다.
떠남에는 늘 설렘이 따른다. 이미 마음속에서 떠날 목적지가 그려지고, 그곳에서 만날 풍경과 사람들에 대한 기대감이 나를 가슴 떨리게 한다. 낯선 곳을 향한 그 첫 발걸음은 알지 못한 모든 것들과의 만남을 예고하며, 나는 그 설렘을 안고 발걸음을 내딛는다. 과거에 머물던 자리에선 느낄 수 없었던 감각들이 여행의 시작에서 솟구친다. 길 위에서, 나는 그저 한 사람으로서, 나그네로서, 세상 속 작은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찰나와도 같은 가을도 나름대로의 순서가 있었다. 그리고 촘촘한 여러 가을들 중 단풍이 절정에 이르러 계절이 무르익었을 때, 나는 떠났다. 혼자는 아니었고 3명의 남자들과 함께였다. 같은 교회를 다니며 친해진 이들이었다. 목적지는 포천에 위치한 숲 속 캠핑장.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캠핑 초짜들은 낭만이라는 단어 하나를 붙들고 캠핑을 하기로 결심했다. 우리의 마음은 함께 마음을 모을 때부터, 온 감각으로 그 공기와 광경을 직접 느끼기까지 울긋불긋 오른 단풍과는 다르게 늘 소망에 푸르렀다.
숲 속은 적막한 소리로 가득했다. 우리가 피운 불이 나무를 태우는 소리와 낙엽을 스치는 가을바람소리, 소곤소곤 캠핑장 예의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소리, 자연의 섭리를 지키려는 쓰레기봉지 휘날리는 소리. 그 소리들, 소리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것들은 기관들을 거쳐 내 안의 무언가에게 닿았다. 별과 함께 나의 눈 너머에 있는 깊이 쌓여있는 것들. 축적되어 나의 꽃을 피우는 거름이 되는 것들이며 두 눈의 망막들을 덮어 그것으로 보게 하는 것들. 나는 그 자리에서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 그것들을 쌓기 위하여 이곳에 왔다고 단언할 수 있다. 우리는 주로 그것들을 ‘경험’이라고 부른다.
경험을 쌓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난다. 인간은 경험에 많은 중요도를 두고 많은 투자를 감행한다. 어떠한 경험이든, 자신의 경험이든 타인의 경험이든 둘 모두 ‘나’라는 사람의 인생관에 있어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 경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이라는 존재는 결국은 초월적인 소수의 순간을 제외하고는(어쩌면 그 순간들조차도) 본인의 득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을 여전히, 그리고 수없이 경험해 왔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다음 아침에 눈을 뜰 때까지 우리는 이득을 위해 살아간다. 이 이득을 살펴볼 때, ‘이기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이득은 효율로써 시간적인, 경제적인, 혹은 관계적인 득을 말한다.
각 분야별의 득의 정도를 따져 우리는 ‘희생’한다. 경제적인 손해를 통해 더 큰 시간적인 득을 취하기도 하고, 시간적인 손해를 통해 사회적인 득을 취하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사실 인간은 ‘이기적’ 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이득은 분야별로도 다양하게 나눌 수 있지만 단순히 특정 상황에서의 이득보다 우리는 한 수 앞을 더 보기도 한다. 현재의 득을 뛰어넘어 과거의 득, 또 미래의 득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한다. 과거의 손해를 메꾸기 위해, 혹은 미래의 본인의 이미지를 위해 인간은 현재를 희생하고 선택한다.
그렇다면 다시, 경험한다는 것이 나에게 무슨 득이 되는가. 내가 보고 느끼는 것, 직접 체험하는 것, 이것이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경험은 인간에게 두 가지 씨앗을 심어준다. 첫 번째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직접적인 기억이다. 추억이라고도 하는 이 씨앗은 강렬하든 부드럽든 빠르게 땅 속 깊은 곳에 심어진다. 그렇게 잊혀지지만 가끔씩 또는 필요한 순간에 싹을 틔운다. 이 싹은 민들레가 되어 날아갈 지식이 될 수도, 세잎클로버가 되어 수많은 데이터 중 하나가 될 수도, 또는 깊이깊이 뻗다 본질에 닿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될 수도 있다.
두 번째는 무의식 속에 심어지는 경험이다. 이것은 단순한 하나의 경험으로는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쌓이고 쌓여 본질적인 무언가, 예를 들면 가치관이나 시야, 또는 성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씨앗이다. 이것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속의 뿌리는 깊고 넓게 개인의 본질에 내려앉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서히 자신의 심연에 발아하여 자라서 나중에는 일반적인 도끼로는 쓰러트리지 못할 나무가 된다.
떠난다는 것은 결국, 이전의 나를 떠나 새로운 나를 찾으러 떠나는 여정이다. 그곳이 얼마나 낯설고,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할지라도 그 길 위에서 나는 다시 한번 나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떠나는 순간, 설렘은 두려움을 녹여내고, 그 설렘 속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무엇을 꽃피울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나는 심고 있고, 자라고 있고 피워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떠나는 것, 그것이 바로 여행의 본질이자 우리가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