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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영 Oct 25. 2024

2. 선팅된 소나타

일상의 깊이

 이 세상 누구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일 수 있고, 내가 보이길 원하는 이미지일 수도 있다. 남들이 실제로 생각하는 이미지는 또 다를 수도 있다. 그것은 내가 아닐 수도 있지만 또 나일 수도 있다. 내가 변하듯, 그것도 변할 수 있다. 이미지 자체가 변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도 변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서도 변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개방적으로, 다른 누군가에겐 폐쇄적으로. 가족에게는 자연적으로, 동료에게는 계산적으로. 여러 순간들이 있고 그때마다 우리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들이 모여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선택들은 자신의 어떠한 이미지를 겨냥해 선택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그 선택은 꾸며낸 것일 수 있고 실제로 원해서 선택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떠한 선택이든, 그 선택은 ‘본연의 나’가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결국 이미지는, ‘없는 나’를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있는 나’를 얼마만큼 드러내냐의 차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한 살 많은 친한 형이 있다. 오래전부터 같은 교회에서 만나 친하게 지내던 사이라 지금은 사실 서로 형 동생을 따지지는 않는다. 초등학생 때부터 함께 지내왔지만, 이제는 취업도 해서 일도 잘하고 차도 있는 꽤나 괜찮은 양반이다. 형은 항상 교회를 걷거나, 자전거로 왔다 갔다 하는 나를 집까지 차에 태워주고는 했다. 걸어서 15분에서 20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조수석에서 편하게 집까지 가는 것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형의 차는 소나타였다. 회색 소나타. 중고로 구한 본인의 첫 차였다. 차에 탈 때마다 보이는 깔끔한 내부와 콧속에 스며드는 라벤더 향기는 그 소나타에 대한 형의 애정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하루는 그의 조수석에서 차를 얻어 탈 때였다. 함께 운동을 하러 가는 길이었고 나는 배낭에 운동할 때 갈아입을 옷들을 챙겨놨다. 이동하던 중 문득 여기서 미리 옷을 갈아입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형은 어렸을 때부터 본 사이라 상관이 없었고 무엇보다 시커먼 앞유리와 옆유리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나 옷 좀 갈아입을게.” 형에게 통보하듯 말했다. 형도 별 신경 안 쓰는 눈치였다. 그렇게 무언의 동의를 얻고는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이게 선팅이어서 가면서 옷도 갈아입고, 좋네.” 그리고 그다음 형의 말은 나를 큰 혼란에 휩싸이게 했다. “어? 이거 선팅 아닌데?” 그 말을 듣자마자 떠오른 것은 옷을 갈아입으며 눈이 마주친 버스정류장의 여성이었다. “그럼 밖에서 나 옷 갈아입는 거 다 보였겠네?” 선팅이 된 것이라 착각하고 당연히 눈이 마주치지 않은 것이라고 오해했던 것이다. “그치, 왜 누가 너 봤어?”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분명히 나와 눈이 마주쳤다. 형에게는 드러나도 상관없을 나의 몸이 이름 모를 여성에게도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그분도 아마 조수석에서 상반신을 노출하고 있는 나를 보고 많이 당황했을 거라 생각한다.


 무의식 속에 나를 드러내는 것은 때로는 제어가 되지 않는다. 이는 특히 대화를 할 때 많이 나타나는데, 그 대화의 질에 따라 나의 노출의 정도가 결정된다. 대화의 희열은 상대방이 얼마나 나의 의도를 파악하냐에 대한 판단에 따라 큰 폭으로 상승한다. 그리고 이것이 잘 이루어질 때, 그 대화는 깊어진다. 깊어진 희열은 자신의 울타리를 점점 허물게 한다. 대화가 이루어질 때 자신의 경험이나 과거가 드러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마치 아이돌 콘서트에 간 광팬의 응원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일상에서는 표현하지 못할 아이돌에 대한 사랑을 응원봉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며 마음껏 표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의 심연에 위치한 ‘나’이자 평소에는 철저히 숨기려고 하는 ‘본연의 나’ 일 것이다. 물론 평소에도 다른 광팬들이 존재하거나 숨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다면, 굳이 숨기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환경과 판단 속에서는 아마도 일상에서부터 많은 자기 노출을 행할 가능성이 크다. 카페에 모여 이번 행사 때의 아이돌의 미모를 칭찬하거나 새로 나온 굿즈에 관해 이야기를 하거나 할 것이다. 이러한 자기 노출은 건강하지만 매번 건강하게 나의 모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나의 사생활이 약점으로 느껴질 때 이것은 더 어려워진다. 때로는 너무 과한 흥분으로 인한 정보 노출은 오히려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노출시키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친구에게 조금의 공감만 해줘도 봇물 터지듯 본인 이야기를 과하게 늘어내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시라 할 수 있겠다. 선팅되지 않은 소나타 안에서의 나도 너무 많은 자기 노출을 한 셈이다. 때문에 우리는 항상 조심한다. 나를 드러내기를 조심하고, 나의 사생활을 최대한 숨기려고 한다. 건강한 자기 노출보다는 약점을 드러내는 것의 리스크를 더 두려워하는 현대 사회의 전반적인 관점도 이유일 수 있다.


 이러한 풍조와 자기 방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는 사람들을 만난다. 대부분은 상황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상황, 그 아이돌의 미모에 넋이 나가버릴 것만 같은 상황. 그들은 조금의 공감에 이 때다 싶어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들은 그 조금의 공감이 자신에게 너무나도 필요했던 것이다. 너무나도 원했고, 너무나도 반가운 반응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머릿속을 열어 모두를 보여주고 마음속까지도 전부 드러내고 나면 그제야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크나큰 후회와 자책 뒤에 따라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만들어진 믿음이다. 이 사람은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는 믿음. 설령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이 사람은 알아서 잘 넘길 것이라는 믿음. 오늘 내가 이 사람에게 쏟아낸 것은 실수가 아니라는 헛된 믿음. 이 믿음이 대부분 모조품이라는 것은 후에 밝혀지게 되지만 사람들은 오늘도 그것이 진품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끝까지 그 여성이 나와 눈을 마주친 게 아닐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 나도 그런 헛된 믿음을 품었던 것 같다. 형은 내일이면 다 잊을 거라고, 너도 내일이면 그 사람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것이라고 조금의 위로를 건네주었다. 나는 그 위로를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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