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깊이
누구나 사는 동네마다 만남의 광장이 존재한다. 우리는 친구들과의 약속을 잡거나 할 때, 말하지 않아도 모이는 집결지를 그렇게 부르고는 한다. 시간만 정해놓고 슬슬 그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모두가 그곳에 모여있었다. 내가 사는 노원구에는 ‘노원 문화의 거리’가 그 역할을 했다. 무엇이 노원구의 문화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운데 세워진 구릿빛 동상이 우리 구 나름대로의 역사와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그 동상이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만남의 광장답게 그곳은 늘 사람들로 북적이고 식당과 카페, 여러 놀거리들로 가득한 거리였다. 글쓴이의 학창 시절도 이곳에서 보낸 기억들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노원구 학생들을 포함한 구민들이 가장 편안해하고 즐겨 찾는 곳이 바로 문화의 거리다. 사람이 몰리는 곳에는 목적이 있는 자들도 있는 법이었다. 식당과 카페가 가장 대표적인 것들이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기에 당연한 위치선정이었다. 이들뿐만 아니라 설문조사나 버스킹, 전단지와 같은 것들도 사람들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겠다. 하루는 글쓴이가 그 거리 구석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멀리서부터도 눈에 띄었다. 훤칠한 키에 깔끔하고 딱 맞는 핏의 검은 정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외국인이었다. 두 젊어 보이는 검은 정장의 두 신사는 그렇게 내 쪽으로 걷고 있었다. 사실 나의 앞에 설 때까지도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핸드폰을 하고 있기도 했고, 그만큼 사람이 많은 곳이라 나의 뇌에서는 그들을 지나가는 행인들로 판단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다. 그들이 앞에 섰을 때,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당황이었다. 더 당황스러웠던 것은 두 분이 너무나 유창하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넨 것이었다.
그 두 유창한 외국인들이 사실은 몰몬교였고 나에게 포교를 시도한 것이었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고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잘생기고 훤칠한 두 서양 남성이 너무나 친근하게 한국말을 하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대학생이냐고, 어디에 가던 길이냐고 완전한 문장의 한국말로 이루어진 그들의 질문에 머릿속이 하얘진 나는, 그 질문에 모조리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있냐고 물어보며 함께 맥도널드에 가자는 낯선 얼굴의 유혹은 꽤나 가볍고 달콤했다. 패스트푸드점은 가벼운 곳이라는 나의 철학은 그 유혹을 넙죽 받아먹게 했다.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주며 빈자리를 찾고는 함께 앉게 되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색한 공기가 막 이 공간을 지배할 찰나, 그들이 또 먼저 말을 걸어왔다. “한국은 참 자유로운 곳인 것 같아요. 여기 와서 너무 자유로워요. 당신도 지금 자유롭나요? “ 신사의 질문은 어눌했지만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었다. ”자유요? 음.. 잘 모르겠네요. 내가 자유로운지, 아닌지.. 애초에 자유가 뭔지도 가끔은 헷갈리네요. “ 외국인을 대상으로 너무 진지하게 대답한 건 아닌가 말이 끝나자마자 약간의 후회가 생겼다. 그래도 진심이었다. 자유와 같은 추상적인 단어들에 대한 정의를 나름대로 정립하려던 시절이 있었다. 지인들의 이야기나 유튜브 영상을 통해 다양한 의견들, 꽤나 설득력 있던 말들까지 들었지만 뭔가 나에게 확 다가오는 것은 없었다.
추상의 구체화란 감각적일 수 없는 추상적인 개념을 감각적으로 나타낼 수 있게 하는 표현을 추상의 구체화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이 깊다고 하거나 말을 잘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이 추상의 구체화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추상적인 주제를 얼마나 논리적으로 포장하는지, 얼마나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지는 생각이 깊고 말을 잘하는 기준 중 하나가 되었다.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화하는 것은 어렵지만 사람들은 이를 끊임없이 시도한다. 인간은 항상 무언가를 정의 내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이것이 유죄인지, 인간은 무엇이고 무엇이 정답인지, 나는 누구인지 항상 정의 내리기를 갈구한다.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는 사람 개인개인마다 저마다의 주관이 섞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말을 잘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이 주관을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아주 멋들어지게 본인의 논리를 구사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갈구를 충족시켜 준다. 각각의 개인들이 나름대로 구체화한 추상적인 것들의 빈틈들을 건드려주는 것에 개인들은 희열을 느끼며 그 사람의 뜻대로 사고가 정립된다. 하지만 이것이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면 세뇌가 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사이비가 탄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 점에서 무언가를 정의 내리기를 두려워하며 다가오는 것이 없다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추상적인 것은 말 그대로 추상적이기 때문에 쉽게 정의 내릴 수 없고 구체화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답이 없다는 것이고, 이것을 알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본인이 정답이라고 믿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들여다볼 때 우리는 비로소 객관적인 존재가 된다. 객관적인 것은 정답을 판별하는 능력을 객관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의견이나 생각에 주관이 없는 것을 ‘객관적이다’라고 한다. 누군가가 추상의 구체화를 펼칠 때 최대한 객관적인 상태로 들어야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본인도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 상태로 대화에 진입하는 것 또한 나의 정의를 다른 누군가에게 강요하지 않을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멋쟁이 두 신사들과의 대화가 그 이후로는 편해진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너무나 다른 주관들끼리의 대화는 흘러가듯 지나갔고 흔적은 남지 않았다. 못 들었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을, 결국엔 스쳐갈 여러 이야기들이 오고 간 후 우리는 헤어졌다. 마지막에 번호를 물어보던 그들에게 생각 없이 번호를 찍어 넘겨주기는 했지만 이후 오는 연락에 답을 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몰몬교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있지만 다가옴 없는 물러남은 관계를 멀어지게 할 뿐이었다. 객관적인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누군가와 대화를 하려면 나도 어느 정도 나아감이 필요하다는 것은 또 시간이 지나서야 깨우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