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되고 우리가 된다.

김훈산문 허송세월 책리뷰 4

by 바다에 지는 별
최초의 어린이날 행사는 1923년 5월 1일 천도교회당 앞마당에서 열렸다. 스물네 살의 청년 방정환과 그의 젊은 벗들이 이행사를 기획하고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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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행사를 알리는 전단 12만 장이 배포되었다. 당시의 종이와 인쇄 사정으로 봐서 12만 장은 놀라운 물량이었는데, 물량보다 더 역사적인 것은 그 전단의 내용이었다. 그 내용을 몇 줄 소개한다.

<소년운동의 기초조건>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그들에게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라.

*어린이에 대한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어린 동무들에게>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어른들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끼리도 서로 존대하기로 합시다.

<어린이날의 약속>
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내 아들놈, 내 딸년하고 자기 물건처럼 여기지 말고 자기보다 한결 더 새로운 시대의 새 인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젊은 방정환의 이 외침을 들으면, 요즘의 어린이날이 얼마나 퇴행적인가를 다들 알 수 있다. 지금,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보면서 삶과 미래에 대한 영감을 얻는 어린이는 없다. 어린이는 어른이 만든 목줄에 짧게 묶여 있다. 어린이는 '내 새끼'일뿐이다. 집집마다 '아이고 내 새끼야'를 외치는 날은 젊은 방정환이 설계한 어린이날이 아니다. 지금의 어린이날은 '내 새끼의 날'이다 다들 제 자식만 끌어안고 있으면 이 나라의 모든 어린이들은 '남의 자식'이 된다.

-김훈산문 허송세월 3부 아이들아,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보아라 2 255-256에서 발췌-

3부 푸르른 날을 읽고 있다. 그 유명한 '종의 기원'을 저술한 찰스 다윈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1831년 피츠로이 선장의 지인으로 승선했고 찰스 다윈은 항해와는 전혀 무관한 손님 신분이었다. 글은 항해 4년 10개월 동안 배가 정박하는 섬마다 지질, 지형, 기후들을 탐사하면서 기록한 것을 엮어 종의 기원이 탄생했음을 이야기한다. 다소 짧은 연구내용으로 발간된 책을 소개하는 작가는 기록의 정확성이나 치밀함보다 기원이라는 시작의 경이로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생명의 경이로움을 다루는 젊은 물리학자로 영국에는 22살의 젊은 찰스 다윈이 있었다면 조선에는 정약용, 정약전, 이승훈, 이벽이 있다고 소개한다. 이 젊은 이들은 새로운 인륜도덕과 물리적 시공간의 운동법칙은 범주가 다른 것이라는 세계관에 눈뜨기 시작한 엘리트 지식인이자, 조선 천주고 신앙의 선구자였다.


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조선에서 이뤄진 잔인한 천주교도의 박해에 대한 내용들을 쏟아내고 독실한 천주교도이자 독립투사인 안중근에 이른다.

안중근의 죽음 이후, 아이와 여성을 존중하는 교리의 천주교와 동학의 공통점에 대해 다루고 글은 천주교 교주, 손병희의 가족의 일원이 된 방정환에 이르러 위의 글이 등장한다.


많은 시대를 건너왔고 시대마다 많은 사상과 이념이 생겨나고 발전해 왔다. 그 발전에 비해 생명과 인륜의 존중은 그 걸음에 미치지 못했고 조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여성과 아이들, 천한 자를 차별하지 않는 천주교의 교리는 핍박받고, 천대받던 사람들의 가슴을 얼마나 뜨겁게 타오르게 했을지 짐작이 간다.


며 칠 전 회사 회식을 끝내고 버스에 오르는데 따라 올라오는 세명의 여학생들이 기사에게 본인들의 목적지에 가는지 물어보았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던 기사는 마스크 때문인지 어떤지 버스에 오르는 내게도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연거푸 학생들이 질문하자 소리를 꽥 지르면서 간다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무안하고 화가 나는데 말은 못 하고 자리에 앉아서도 한참을 저희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이를 가진 부모로서, 한 사람의 고객으로서도 학생들과 비슷한 무안함과 모멸감을 느꼈고 하차하자마자 나는 버스 번호를 저장했다. 그 일은 며 칠 동안 계속 마음에 남았고 오늘에서야 어렵게 버스 편신고에 글을 남겼다.

불편 신고하는 경로는 매우 까다로웠고(이러한 시스템조차도 변화를 싫어하는 기업들의 얄팍한 꼼수로 느껴진다.) 이러한 번거로움과 신고하고 싶은 마음에 갈등을 일으켰다. 나의 글이 그 기사의 행동변화에 미력한 영향이 있을지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선 안 될 일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마지막 직업이 버스기사였다. 그래서 그 일이 무뚝뚝한 남자들에겐 얼마나 성가시고 짜증스러운 직업인지 너무도 잘 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조금 다른 변화의 조짐들은 있다. 서비스교육을 정기적으로 시키고, 페널티도 주는 등 색다른 시도도 있지만 사람의 마음과 행동은 쉽게 변하기 어렵다. 나 또한 서비직이라 그 단단한 마음이 부드러워지려면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함을 안다. 그것은 자신의 밥줄이 고객임을 자각하는 시점에 다다르지 않으면 결코 나긋나긋해지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밥줄, 과장되게 나아간다면 자신의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이들을 대하는 자세에는 분명 변화가 있어야 마땅하다. 자신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생각에 더해 타인의 생명과 권리도 소중한 것임을 동일시하게 되는 시점에 가닿는다면 얼마나 자연스러운 친절함과 배려가, 그리고 진심이 우러 져 나오게 될까?


이 책의 3장에는 유난히 죽음과 핍박의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렇게 잔혹한 죽음의 그늘을 비껴가며 가까스로 살아남아 지금의 우리로 서 있음을 자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나와 너는 그 수많은 전쟁으로 침략당하고 그로 인한 수많은 죽음의 언덕을 건너온 '우리'인 것이다. 이러한 책의 흐름으로 맞이하는 방정환선생의 글은 쉽게 쓰인 듯하나 묵직하고 열정 가득한 힘이 느껴진다. 한 세대가 서서히 사라지고 새로운 세대에게 시간을 건넬 때 그들이 자라나는 과정 중에 어떤 어른을 만나고, 어떤 대접을 받느냐에 따라 그 시대가 달라진다고 하면 이 또한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할 일이다. 소멸해 가는 세대가 새 시대의 사람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를 지금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좀 더 이야기하자면 우리나라의 특징은 빠른 성장으로 많은 것을 놓치고, 지나쳐버린 것들 중 하나가 인권이라는 것이다. 인권경시는 어린 세대부터 노인층까지 전체적으로 만연시 되어 있다. 서로를 상처주기에 바쁘고 언제든 개개인이 흉기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과거에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주된 가해자였다면 지금은 그 어떤 이도 마음만 잘 못 먹으면 쉽게 가해자가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쉽게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그 마음 속에 생명과 인권을 경시하는 마음이 숨어 있는 것이다. 글이 멀리 간 듯 하지만 작가의 다소 서늘한 필력 속에 결국은 생명의 소중함, 그리고 경외감이 깊숙이 숨겨 두었다. 내가 소중한 생명이 듯, 타인도 마찬가지로 소중한 생명임을 강조하기 위해 먼 영국의 학자부터 한국의 방정환에 긴 글로 아우르며 내 자식, 나에게만 시선을 국한시키지 않고 내 주변을 따듯한 눈으로 돌아보고 챙겨가는 어른이 되자는 작가의 글이 가슴에 와 닿았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