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몸을 덥게 만들던 술기운이 다한 탓인지, 잠결에 걷어차버린 이불 탓인지 으스스함이 느껴진다. 몽롱함에 손발을 휘저어 이불을 찾지만 잡히는 게 없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는 만큼, 몸도 한기에 익숙해지며 정신이 돌아온다.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르지만, 깨는 과정은 늘 비슷하다. 몸을 일으키니 견딜만한 숙취의 두통이 잠을 더 빨리 몰아낸다. 더웠는지 창문 아래 맨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아들이 보인다. 어차피 걷어차버릴 이불이기에 대충 덮어주고 머리 한번 쓰다듬어준다. 뭐라고 잠결에 소리를 내는데 알아들을 수는 없다.
차가운 보리차를 마신다. 숙취의 유일한 장점은 물을 달콤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시계를 보니 4시 반을 넘었다. 일어나기에는 월요일이 피곤할 것 같고, 다시 잠들자니 몸은 잠자리에서, 정신은 졸음에서 이미 몇걸음 멀어졌다. 습관이 부르는 것인지, 몸이 부르는 것인지 모르지만 담배를 찾아들고 베란다로 나간다.
창문을 여니 비 냄새가 난다. 흰색이지만 어쩐지 푸른 빛을 보이는 둥근 가로등 주변에서만 가느다란 빗방울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름 모를 나뭇잎에서도 엺은 빗소리가 난다. 이 비는 봄비인가 여름비인가 생각한다. 한 남자가 지나간다. 그는 등푸른 생선 같은 색의 자켓에, 그보다는 연한 푸른빛 셔츠를 입고 있다. 동사무소나 중소기업 총무팀에 어울리는 복장이라 생각한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서류가방을 머리 위로 올리고 비를 가리고 있다. 뛰는 것은 아니고, 비를 피하기 위한 성의를 보인다는 느낌의 속도로 걸어간다. 마음은 서두르는 것 같은데, 동작은 별로 그래 보이지 않는다.
담배 한 모금의 시간을 스쳐간 그 남자가 계속 생각난다. 그는 왜 우산도 없이 이 어둠 속에 출근하고 있을까. 비오는 것을 모르고 내려왔는데, 다시 올라가기가 귀찮았을까. 아니다. 그런 성격이라면 구차하게 가방으로 이슬비 따위를 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시간에 나가려면 새벽 4시에는 일어났을 것이다. 월요일부터 늦을까봐 알람을 맞추고, 알람이 식구들의 단잠을 깨뜨릴까봐 몇번이나 자다 깨며 시계를 보았을 것이다. 알람이 채 한번을 울리기도 전에 끄고 일어났을 것이다. 비가 오는 것도 알아챘을 것이다. 짙푸른 자켓에 덜푸른 셔츠의 동사무소 느낌의 남자라면, 이게 어울린다. 그는 우산을 세어보았을 것이고, 우산이 식구 수보다 하나가 부족한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푸른 어둠 속으로 걸어나왔을 것이다. 그래 그에게는 이게 어울린다.
전자담배가 지잉지잉 울리며 마지막 한모금을 재촉한다. 흰 연기를 길게 내뿜고 들어와서 시계를 보니 4시 40분이다. 이 시간에 버스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는 어디까지 가방을 우산삼아 걸어가고 있을까. 빗방울이 스며들어 검푸르게 변해가는 푸른 자켓을 생각하다 보니 설핏 잠이 들었다. 일곱시를 알리는 알람을 끄고 창밖을 보니, 비의 흔적은 없고 남자의 셔츠보다 밝은 하늘에는 담배 연기같은 구름이 떠있다.
다음 비가 올 때까지, 우산이 하나 모자라는 것은 오직 그 남자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