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기억 중 가장 강렬한 것들은 마지막 날들이다.
뭉뚱그려저 감각 없이 흘러간 보름 남짓한 그 시간이 나는 지금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커다란 흐름이 있고, 순간이 있고, 통증이 있다.
일기장 어딘가에 썼던 토막이 생각났다.
석션하는데 엄마가 아픈지 발을 움찔했었다. 고통이 눈에 보이는 엄마의 발 그런 비슷한 문장이었던 것 같다. 나는 너무 힘들어 그 기록을 버렸나 보다. 너무 꽁꽁 숨겨둬서 찾아내지를 못하거나. 너무 아픈 순간들을 머리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삭제한다고 한다. 나는 그걸 몸으로도 했나 보다.
추석이 지났고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전화가 울렸다. 엄마는 연희 이모를 만나고 오겠다고 했다. 목소리는 가게 이모였다. 말을 못 하고 빙빙 돌리는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엄마가 사고가 났는데 빨리 서동 병원으로 오라고. 응급실 밖에서 들여다보는데 엄마가 안보였다. 없는데 왜 엄마가 응급실에 있다는 거지. 한참을 문 밖에서 빙글거리다 다시 들여다보니 응급실 입구에서 마주 보이던 가로로 놓인 침대에 피범벅을 하고 누운 사람이 우리 엄마였다. 엄마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아빠 회사로 전화했다. 야간작업을 하던 아빠는 작업복을 입고 급하게 왔다. 수술은 늦은 시간에 이뤄졌다. 지금도 생각한다. 그때 큰 병원으로 옮겼으면 엄마는 살았을까?
수술은 잘 됐다고 했다. 아빠가 전화로 해준 얘기에 회복만 하면 일상생활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그 전화 내용을 첨에 잘못 알아들었다. 아 엄마 깨어났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하지만 엄마는 눈을 떴구나. 다행이다. 빨리 병원에 가고 싶다. 그게 착각인걸 아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엄마는 의식이 없었고,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중환자실이라고 하지만 중증 수술을 한 환자와 일반 환자들이 섞여 있었다. 보호자가 한 명 있어야 했다. 엄마 옆에서 하루 잤다. 밤새 환하게 불이 켜진 중환자실 보호자 침대에서 두어 번 떨어졌다. 코로 연결된 관에 미음 같은 환자식을 넣어주는 것도 내가 했다. 엄마는 뇌수술을 했는데 이게 맞나? 드라마처럼 좀 더 분리된 공간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간호사가 석션을 해줘야 한다고 하는데 난감해하는 나를 보더니 잘 보라며 시범을 보였다. 난 끝내 못했다.
그 병원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한 일주일쯤이었을까? 엄마 상태는 나빠졌다. 엄마는 점점 온몸이 퉁퉁 부어갔다. 병원을 옮기는 얘기가 나왔다. 옮기게 되면 엄마가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었던 것 같다. 엄마는 앰뷸런스를 타고 집에서 좀 더 가까운 봉생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봉생병원 중환자실은 보호자가 계속 있을 수 없었다. 면회는 하루 두 번. 오전과 오후. 학교 마치고 가게에 가면 이모가 뜨거워서 김이 펄펄 나는 수건을 챙겨줬다. 어중간한 거리를 걸어 병원에 간다. 병원에 도착해 가져간 수건을 비닐봉지에서 꺼내면 아직도 따뜻했다. 엄마 얼굴 손, 발을 꼼꼼히 닦아주고 손도 잡아본다. 엄마는 의식이 없다.
코에 꽂았던 여러 관들을 목에다 바로 연결할 수 있게 후두부 절개 수술을 했다. 엄마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꼬집으면 반응을 한다고 우리는 기뻐했었다. 그런데 나아져야 하는데 뇌가 자꾸 부었다. 5교시였나? 담임 선생님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빨리 병원으로 오라고. 왜 얘기를 안 했냐고 선생님이 물으셨던 것 같다. 뭐라고 대답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면회시간이 아닌데도 면회를 시켜줬다. 침대 머리 부분이 낮춰져 있었다. 엄마 발이 차가웠다. 안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엄마가 이제 그만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밤이 고비라고 했다. 중환자실 밖 의자에 앉아서 한없이 기다렸다. 밤이 깊어갔다. 아빠는 집에 가라고 했다. 나는 병원에 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밤이 길어질 것 같으니 집에 가서 기다리면 전화를 하겠다고 했다. 집에 도착하고 얼마 안돼서 전화가 왔다.
"엄마, 갔다."
엄마는 나랑 동생이 집에 가기를 기다렸던 것 처럼 떠났다. 진짜 마지막은 보여주기 싫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