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겹살집 전채요리로 나온 차가운 호박죽
정말 오랜만에 하는 외식은 조용하고, 무거웠다.
여기에 나오기까지, 제발 그냥 집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뭘 잘했다고, 뭘 축하하기 위해서, 누굴 위해서 하는 외식인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머니는 초등학생인 나를 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체르니, 하농 같은 기본적인 작곡가의 연습곡들을 곧잘 치던 나는 재능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고, 어른들끼리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중 입학을 위해 더 많은, 더 비싼 레슨들을 받기 시작했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한 음악학원에서는 학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올 때까지 선생님의 욕만 들으며 연습했다. 왜 그렇게 시종일관 화가 나 있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냥 존재 자체가 짜증이 난다는 듯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에 내가 안녕할 것 같냐는 대답으로 시작한 선생님과의 시간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모욕적이고 힘들었다.
그렇게 나는 집안의 대출금을 탕진했다.
차라리 그냥 하기 싫다고 하면 될 것을 그것도 무서워서 억지로 억지로 학원으로 나가 울먹거리며 피아노를 치고 시험곡을 준비했다.
합격자 발표 전 날부터 어머니는 말이 없으셨다.
어쩌면 나의 합격이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반항이었을 것이다. 3년간 많은 돈을 써가며 아버지에게 들은 욕설을 책으로 펴낸다면 위인 전집의 양은 가뿐히 넘어설 수 있지 않았을까. 별 생각 없었던 나와는 다르게 더 노심초사 했던건 어머니 였으리라.
혹시 서버가 잘못 된 것인지 전화까지 재차 합격자 여부를 확인한 어머니는 전화를 끊고 이내 고개를 떨구셨다.
나는 결과를 예상한듯 울었다. 아니 예상 했었다.
울어야 어머니가 덜 슬퍼하실 것 같았다.
나에게 울 자격이 있는가. 3년간 진심으로 이 시험을 준비한게 맞는가.
어쩌면 어머니를 희망고문한건 나였다. 모든게 내 잘못이었다.
매달 날아오는 대출금 상환 고지서가 내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 쯤 이었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나로 인한 금전적 어려움들이 기다렸다는 듯 지속적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어떤 감정인지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고 아침에 눈 뜰때부터 저녁 눈감을때까지 서로 주고받는 대화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 때, 2천만원만 더 있었으면 널 예중에 보낼 수 있었어. 그런데 그 돈이 없어서"
나중에야 들을 수 있었던건 실력이 모자라도 돈이 더 있었다면 예중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는 가능성의 말이었다. 끝까지, 내 탓은 하지 않는 엄마였다.
일주일만에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외식을 제안했다.
평상시 같으면 전주비빔밥 같은 것을 먹곤 했지만 아버지가 데리고 간 곳은 꽤 괜찮은 삼겹살집이었다.
"그래도 아들 수고 많았어"
아버지의 말에 다시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난 수고 한게 없다. 정말 열심히 하지 않았고 3년 내내 떨어질 줄 알고 있었다.
차라리 이럴때야말로 욕을 하고 물건을 집어던지며 때렸으면 좋겠다. 그냥 맞고 싶다.
나는 무슨 짓을 한 걸까, 저 말은 진심일까, 생각하며 호박죽을 한 술 떠 맛 보았다.
달다.
달고 부드럽다.
뭘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달콤해서 몇 그릇이고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우자 어머니는 자기 것도 먹으라며 나에게 호박죽을 건네 주었다.
그냥 받아 먹었다.
이젠 무슨 맛이 나는지도 모르겠지만 숟가락질을 계속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것 밖에 할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