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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로 Jun 03. 2024

그리고 배추김치

사 먹는 김치는 집 김치보다 훨씬 맛있었다

 20대가 되어서도 계속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늦게 가게 된 군생활이 끝났다.

군생활은 힘들었지만, 가족들과 떨어져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해방감이 들어 더 자유롭고 행복했다.


 군생활은 2년간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이기에 억울해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푼 돈을 월급이랍시며 받아가며 생활하는 2년.

 일어나야 하는 시간에 일어나고, 먹어야 하는 시간에 먹어야 하며 부당한 일이 있어도 의사표현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곳.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동생들에게 극 존칭을 써가며 하기 싫은 일을 매일같이 해야 하는 곳.

 

그곳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집보다는 마음 편하고 쉬운 곳이었다.


 전역하는 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결심했다.


 나는 집에서 벗어나야겠다.




 "나 다음 주부터 대구로 내려가서 살려고"


 저녁 밥상 앞에서, 나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거냐고 묻는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내 생각을 이해할 수 없으셨던 아버지는 많은 질문을 하셨지만 나는 그것에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말처럼 나에겐 정말로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있었다.


 새벽에 싸우는 소리에 깨서 엄마와 아버지의 싸움을 말리는 날들이 사라진다면.

 억지로 끌려나가 술주정을 들으며 밤새는 날들이 없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돈은 대구에서 벌면 된다. 달라고 하는 돈은 송금하면 된다. 연락을 끊겠다는 게 아니다. 혼자서 살아보겠다.


 이것은 설득이 아니라 통보였다. 어쩌면 본능이 말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그렇게 산다면 너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거라고 말이다.


 나의 억지에 엄마는 힘을 실어 주었다.

 같이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내가 나가려는 이유에 대해 잘 알고 계셨으리라.


 내가 집에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엄마의 고통은 정말 미안하지만 평생 짊어지고 갈 수 없는 부분이었다.


 



 현금 서비스로 150만 원을 대출받아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25만 원짜리 세탁기도 없는 작은 단칸방을 구했다.


 에어컨, 침대, 인덕션 같은 모든 살림들은 옵션으로 딸려있어 따로 살 필요가 없었다.

 125만 원이면 간섭받지 않고 잘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구나.


 이사는 잘했냐며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사라고 해야 하나. 응, 대충 정리했어.


 냉장고에 슈퍼에서 산 반찬을 넣으며 대답했다.


  2년간 내가 없는 집에서 나에게 말하지 못할 만한 일들도 벌어졌을 것이다.

 이를 악물고 외면한다.


 반찬 같은 거 필요하면 말해, 얼른 쉬고.


 엄마는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감정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이제는 익숙해진 모양이다.


 텍스트로만 보면 차갑디 차가운 대화. 그 안에는 서로를 향한 사랑, 그리고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앞으로 우리는 살아가야 하기에 보호막 없이 부딪혀 봐야 한다.


 엄마도, 나도.


 

 시원찮은 출력의 인덕션으로 겨우겨우 스팸을 굽고, 계란프라이를 튀겼다.

 좁은 방 안에 기름 냄새가 가득하다. 널브러져 있는 옷에 냄새가 다 배겠지. 아무렴 어때.


 그리고는 슈퍼에서 산 김치를 까서 인덕션 옆에 선 채로 입에 넣었다.


 앉아서 밥 먹을 공간도 없는 방. 조용한 방 안에 김치 씹는 소리가 아삭아삭 울려 퍼진다.

 맛있다. 집 김치의 콤콤하고 짠맛도 없고, 담백하고 상큼하다.


 너무너무 맛있다.


 지금쯤 엄마는 소화가 잘 안 된다며 또 물에 밥을 말아먹고 있으려나.

 아버지는 술 한잔 하러 나갔으려나.


 어두워진 서울 집 앞의 풍경이 잠깐 떠오른다.


 울었다. 왜 우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복도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내가 우는 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겠다.


 오늘은 그냥 울자고 생각했다. 적당히 울다가 말겠지. 울고 나면 밥은 다 식어 있을 것이다.


 모락모락, 아직도 전자레인지에 돌린 햇반에선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식으려면 한참 걸리겠네.

 어두컴컴한 방이 눈물 때문인지 요동을 친다.


 흐려진 시야로 전에 살던 사람이 천장에 붙여놓은 야광 별 스티커가 반짝인다.

 불이 꺼지고 나서 그제야 빛을 발하는 야광 별. 싸구려겠지만 어두운 방 안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저것도 저렇게 빛나는데

 그래도 아직 살아 있으니까 떠 놓은 한 숟갈을 입에 밀어 넣자.


 식어 빠져서 맛이 없어도 한 숟갈 더 입에 밀어 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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