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민리그 3라운드가 있던 초여름의 어느 날이다. 상대팀은 우리 동고FC보다 비교적 약팀인 것으로 보였다. 사실 그런 건지 아닌지 경기 전에는 모르지만 코칭 스태프가 그렇다고 하니까. 나는 간만에 선발 선수로 투입됐고, 경기가 끝날 때까지 왼쪽 수비수 자리를 지켜야 했다.
상대의 전력이 비교적 열세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날 경기가 잘 풀렸던 건 아니다. 상대의 압박은 느슨했는데, 그래서일까? 공을 뺏어도 자꾸만 패스 실수나 무리한 슛으로 공격 기회를 허투루 날려버렸기에, 우리가 공을 오래 소유하는 일도 그리 많지 않았다. 상대 공격수들은 전혀 수비를 하지 않았고, 그러니까 상대 공격수 네 명은 우리 수비수 네 명과 함께 서서 쉬고 있었던 터라, 공격 기회를 잃을 때마다 그 넷에게 한 번에 공이 연결됐고 그래서 우리팀 전체는 상대의 역습을 막으려고 왔다리 갔다리 스프린트를 반복하느라 아주 죽을 맛이었다. 제발 공 좀 지켜, 얘들아. 심지어, 그날 플레잉 코치 준형은 센터백으로 투입됐는데, 내가 상대 공격수에게 무리하게 도전했다가 제쳐졌고, 그가 그 뒷감당을 하다가 발목을 접질려 교체 아웃된 데 죄책감을 느껴서인지 나는 몸도 마음도 편치 않았다. 전반전은 그렇게 0:0으로 끝났다.
그날 왼쪽 공격수 자리에는 은성이가 투입됐다. 빠르고 감각이 남다른 그였지만 그날따라 공격 기회를 잃는 일이 잦았다. 그의 실수 하나하나가 팀에겐 더 아쉽게 다가왔던 탓인지, 경기장 밖에서 감독도 소리쳤고, 팀원들도 그 친구에게 소리쳤다. 무리하게 플레이하지 말라고. 모두들 목소리가 날카로웠고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는데, 그중 주장 수영이가 그에게 소리치며 했던 말은 참으로 그랬다.
“야! 벤치 말 안 들을 거면, 그냥 나가!”
이건 좀 선 넘은 거 같다는 생각에, 수영의 흥분을 누그러뜨리려 나는 그에게 소리쳤다.
“수영! 말 좋게 해, 좋게!”
“뭘 좋게 말해! 지금 쟤가 자꾸 똥 싸는데 어떻게 좋게 말하냐고!”
수영은 공격적으로 반응했다. 무섭게 나한테 왜 그래….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나는 다시 소리쳤다.
“아니야! 우리 더 좋게 말할 수 있어! 하려면 할 수 있어! 자, 다시!”
살다보면 우리는 못 하는 사람에게 나쁘게 대할 때가 있다. 화를 내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하며, 조롱하거나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아예 무시해버리는 경우도 있고. 그래도 된다고 어릴 적 학교에서 가르쳐 준 적은 없는 것 같지만—참 잘했어요, 같은 칭찬은 가르쳐 줬더랬지— 아무튼 우리는 그러고 있다. 게임에서는 초보방임에도 초보에게 못한다고 욕을 하고, 직장에서는, 우리 회사는 열심히 하는 사람보단 잘 하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하며 어떤 이의 무능을 두고 비난한다. 그저 못 한 게 아니라, 아예 죄를 범한 것이라면? 아주 살벌해지는 거지.
짜증이야 날 수 있지, 사람인데. 하지만 짜증이 난다 해서 그대로 짜증을 내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다. 기분대로 하는 건 쉬우니까. 짜증이 나지만 짜증을 내지 않는 것, 짜증스런 마음을 표현해야겠다면—곱게 말하면 듣질 않는다고? 해 봤어?— 그 방법을 택할 때 신중을 다하는 것, 우리 인간은 그런 데서 품격이라는 생기는 게 아닐까? 좋은 옷 걸치고 좋은 음악 듣고 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고 말이다. 아니, 그리고, 우리가 원숭이는 아니잖아. 상대가 마동석이면 그렇게 짜증을 낼 수 있겠냐고. 사실, 짜증이 난다고 짜증을 낸다는 건 상대가—자기보다 못났거나 아래에 있거나, 아무튼 약해서— 그만큼 만만하단 뜻일 텐데. 우리는 생각을 더 해야 한다. 할 수 있다.
사실 그날 나 역시 은성에게나 다른 팀원들에게나 그리 곱게 말한 거 같진 않다. 경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짜증냈던 나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괴로웠다. 은성아, 미안. 그리고 여러분, 미안.
그날 0의 균형을 깨뜨린 골은 바로 은성의 발에서 나왔다. 시원하게 들어가더군. 그렇게 욕을 먹으면 귀에서 피가 났을 거 같은데. 은성은 악바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