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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엇비슷 Nov 24. 2020

근무시간에 베트남 지도를 검색했던 이유

외국으로 보내는 편지

♬ Hello! Bonjour! Nihao! 안녕! ♪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시간을 거슬러 때는 초등학교 영어시간.  “한 번은 듣고 한 번은 따라 불러 볼 거야!”라고 말씀하시며 선생님은 영상 하나를 보여주셨다. 영상의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세계 여러 나라의 복장을 입은 아이들이 다양한 언어로 인사를 한 후, 서로 어디서 왔는지 묻고 도시와 나라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영상은 끝이 난다.


지금도 가끔 흥얼거릴 정도로 놀라운 중독성을 가진 노래. 노래를 들으며 어린 나는 외국인과 대화하는 것에 대한 환상을 가졌다. 다른 나라, 다른 풍속, 다른 문화권에서 자라났지만 같은 언어로 함께 대화하며 몰랐던 서로를 이해해 나가는 것. 오오. 글로벌하고 멋지다. 자연스럽게 외국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고, 그 환상을 이루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들을 어린 시절부터 열심히 해오고 있다. 하하. 그 노력들 중의 일부를! 부끄럽지만 조금 공개해 보고자 한다.


부모님을 졸라서 필요 없는 지구본 3개나 사기.

밀린 영어 학습지를 선생님께 들킬까 봐 겁나 몰래 장롱 밑에다가 숨기기.

친구랑 사회과부도에 있는 세계지도에서 이상한 지명 찾아 대며 웃기.

한국으로 수학여행 온 일본 아이들과 서로 중지를 올리며 인사하기...


어. 더 공개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최근에는 영어회화에 꽂혀서 영어회화 앱 1년 이용권을 충동적으로 결제한 일이 있다. 사놓고 거의 실행하지를 않아서 초급 단계를 벗어나기도 전에 기간이 만료된 건 비밀이다. 단순한 흥미가 꾸준한 열정으로 이어지기란 정말 어렵다는 걸 다시금 느낀다. 아무튼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며 여러 나라 사람들과 유창하게 대화하며 친분을 쌓는 게 꿈이었던 어린아이는 시간이 흐르고 흘러 조용한 시골 우체국에서 일하게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보이는 것은 먼 산과 커다란 논밭. 밤이 오면 온통 깜깜해서 잘 보이지 않고, 집 주위에 벌레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버스 시간을 제대로 알지 않으면 지각하기 마련이고, 알만한 프랜차이즈 가게는 존재하지 않으며, 문화생활을 해보려고 하면 차로 3,40분 걸리는 인근 도시로 나야 하는 이곳이 내가 요즘 살고 있는 곳이다. 거주지에 대해 좋은 말은 하나도 없고 너무 부정적인 말만 써놓은 게 아닌가 싶지만, 태어나서 지금까지 인생의 대부분을 인프라가 잘 갖춰진 큰 도시에서 살던 사람이 새로 주어진 환경에 적응을 하지 못해 투정하고 떼쓰는 것으로 이해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 이로 인해 전국 시군구 및 읍면동 10곳 중 4곳은 소멸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한다. 학생, 청년들은 다 도시로 빠져나가 버리고, 해야 할 일들은 많으나 일손이 부족해서 고민인 곳이 많다던데, 내가 있는 곳은 해외에서 일을 하러 오신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계신다. 읍내에 있는 인력 사무소에도 새벽이면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국제결혼을 하신 분들도 꽤 있다. 그래서 시골 우체국이긴 하지만 외국으로 보내는 편지나 택배의 양이 꽤 되는 편이다.


우체국에서는 다른 나라로도 편지나 택배를 보낼 수 있으며, 주소나 이름은 영어로 작성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또 우편번호도 작성해 주시는 것이 좋지만 대부분의 고객들은 우편번호를 잘 알지 못하시는 경우가 많다. 물건을 받는 분의 우편번호를 알고 있는 경우에는 그분이 살고 있는 주소가 자동으로 연계가 되어 우편 시스템에 입력이 된다. 우편번호를 모르는 경우라도 주소의 주/도나 시/군, 도시를 검색해서 우편번호를 알아낼 수 있다.


중국, 대만, 베트남, 태국 등등 가본 적 없는 여러 나라들의 주소. 나는 가지 못하지만 너희들은 저 푸른 바다 저 멀리로 떠나는구나. 가끔 외국으로 가는 편지나 택배를 접수할 때면 나름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며 대리 만족을 해보곤 한다. ‘가는 나라가 네덜란드? 음. 튤립과 풍차가 유명하지. 주소가 치앙마이? 음. 태국에서 한 번쯤은 살아보고 싶다. 칠레? 뭐가 유명하지? 잉카? 엘니뇨?’ 대충 이런 식으로  머릿속에서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대잔치를 벌인다거나 그러지는 못했었다.


임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게 어색했고 긴장 가득했던 때의 일이다. 나이가 조금 드신 남편분과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계시는 아내분이 창구 앞으로 오셨다. 서류가방 속에서 꺼내 주신 커다란 편지 봉투. 봉투에 적혀있는 문자는 알파벳이지만 알파벳이 아닌 이상한 문자들. 알파벳 위에 점도 찍혀있고, 체크도 되어있고, 물결표도 그려져 있고. 종이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베트남으로 보내는 편지라 하신다. 아내가 베트남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베트남어로 적힌 주소는 QTP HCM이라는 의문의 단어로 끝을 맺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도시의 이름이라도 대충 알면 우편번호를 확인할 수 있을 텐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고객님.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아세요?”

“글쎄. 그냥 핸드폰 문자 온 그대로 썼어.”


관심 없는 표정으로 대답하며 핸드폰을 보시는 고객님. 아내분께 대신 여쭤보니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신다. 한국어가 그리 익숙하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이는 기다리는 게 지겨웠는지 엄마의 품속에서 계속 칭얼거리고 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안되니 인터넷 창을 열고 QTP HCM을 그대로 검색해본다. QTP 트레이닝? Quick Test Professional? 이게 아니구나. 그럼 HCM만 검색해 볼까? Ho Chi Minh. 아하! 호찌민시의 약자라고 한다. 그럼 호찌민 시를 검색해보자. 길다랗게 뻗은 지도 위로 좌르륵 나오는 호찌민 시의 행정구역. 수없이 이어지는 낯선 도시의 이름들. 톡톡. 고객님이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 기다리는 게 답답하셨던 모양이다. 덩달아 초조해지는 마음.  Huyen Binh Chanh, Huyen Can Gio……  낯선 이름 중에서 왠지 그럴듯한 단어가 보인다. Quan Tan Phu! 대문자만 나열하면 QTP!


“호찌민 쿠안탄푸? 탄푸로 보내시는 거 맞으세요?”  

“응! 떤푸! 탄푸가 아니라 떤푸!”


의아해하던 표정의 아내분이 환하게 웃으신다. 초조했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도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환한 미소였다. 우여곡절 끝에 (나 혼자만의 우여곡절이었지만) 무사히 편지를 보내고 돌아가시는 가족. 남편은 아내에게 아이를 받아 소중히 껴안고, 아내는 남편의 서류가방을 챙긴다. 아이는 엄마가 웃는게 좋았는지 자기도 덩달아 웃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나서 한 검색어를 초록 창에 두드린다. 검색 결과를 확인한 뒤 떠나는 가족의 뒤를 향해 방금 찾았던 말을 외친다.


“Cảm ơn. (깜 언)!”


‘감사합니다 베트남어로’.  내 발음이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돌아보고 인사를 해주시는 가족. 분명 베트남어로 이야기하신 것 같지만 알아 듣지는 못했다. 나중에 한번 검색해봐야지. 다른 나라, 다른 풍속, 다른 문화권에서 자라났지만 같은 언어로 함께 대화하며 몰랐던 서로를 이해해 나가는 것. 어릴 때 바라던 유창한 대화도 아니었고, 또 생각한 만큼 글로벌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뭔가 대화가 된 것 같아서 기뻤다. 다음에 오실 때는 더 많이 대화를 해봐야겠다 생각하며 나는 또 다른 검색어를 초록 창에 두드려 본다.


'안녕하세요 베트남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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