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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끌 Sep 25. 2022

일요일 자정, 더 우울해지고 싶을 때




차라리 더 우울해지고 싶다.



일요일 자정 무렵이면 습관적으로 유튜브나 SNS를 떠돌곤 했다. 나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 새벽 2시쯤 되면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잠들지 않으면 내일 지각을 할지도 모른다.'


답답했다. 내가 찾는 게 무언지 알 수 없었다. 내 감정을 모르니 찾는 것도 를 수밖에. 그럴 때마다 난 마음난독증이 아닐까 생각했다. 자신의 감정을 읽는 데 서툰 병, 마음난독증.


평상시에도 서툰 편이다. 몇 개월 뒤 혹은 몇 년 뒤 뒤돌아 보곤 '그때 난 좀 우울했구나' 혹은 '그때 난 그를 사랑했구나' 하고 느꼈다. 그런 내게 자정 무렵 감정은 해독 불가 암호다. 감정이 10가지가 넘는 조미료가 든 요리처럼 뒤섞여 있다. 두려움, 불안, 우울, 슬픔, 초조, 쓸쓸함, 무기력함 등이 내 몸을 주재료로 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요리를 했다. 그중에 어떤 감정이 우세한 게 아니라서 처방을 내리기 어려웠다. 명확하게 솟아오르는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 속으로 외쳤다. '차라리 더 우울해지고 싶다.'


자정 무렵 유독 마음이 복잡한 이유는 새로 시작하는 한 주 또는 하루가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안다, 별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란 사실을. 내가 예상한 범위 내에서 그리 크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설사 예상 밖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낮 동안  마음 장치 괜찮을 것이다.  


그것은 좀처럼 파괴되지 않을 것이다. 나와 오래 맞춰 본 장치 다양한 옵션에 적응할 수 있다. 적어도 사회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만들어준다. 그들은 내 장치가 밤이면 고장 나는 걸 모르니까. 런 생각 한 편엔 차라리 괜찮은 척하지 말고 산산조각 났으면, 하고 바란다. 바닥에 이르면 난 그제야 침전 상태를 벗아나 솟아오를 것 같았다.


차라리 산산조각 났으면


'아니 아니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분열하는 마음은 갈피를 못 잡는다. 어느 땐 더 단단해졌으면 좋겠고 어느 땐 차라리 파괴되었으면 좋겠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불안하가도 이 불안이 어떤 식으로든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오랫 동안 그랬다. 이제는 나이도 들었고 좀 편안해졌으니 괜찮아질 거라 생각하다가도 다시 그런다. 


<번역된 도자기>란 작품이 있다. 조각가 이수경은 폐기 처리된 도자기 조각을 이어 붙여서 금테를 둘러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만든다. 세상에 한 번 폐기 선언을 받고 난 후 전보다 오히려 더 가치 있는 작품으로 탄생한 도자기들. 하지만 난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깨진 도자기 조각을 이어 붙인 것은 내게 기이하게 보였다. 

'아무도 파괴되고 싶어하지 않아. 이건 실패한 이들을 향한 값싼 동정일 뿐이야. 그리고 이 모양을 설마 예쁘다고 주장하고 싶은 건가?'


파괴된 자들은 너무 아프다. 그들에게 '그래도 우리 힘내 봐요. 당신은 작품이 될 수 있어요! '란 격려는 허무하게 들릴 뿐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박해일은 '나는, 붕괴되었어요' 하고 자신의 심경을 표현한다. 우리는 바란다. 내 인생에 붕괴되는 일 따윈 없기를. 영화처럼 예 돌아오기 힘들어 보이는 붕괴나 파괴는 너무 많다. 파괴 후 더 견고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파괴되고 회복되는 과정이 너무 아프다.


시간이 흘러 문득 <번역된 도자기>가 떠올랐다. 다시 찾아 보니 울퉁불퉁 못 생겨보였던 도자기들이 괜찮아 보였다. 도자기는 꼭 부드러운 곡선이어야 한다는 건 나의 고정관념이었다. 기존과 다른 기이한 모양의 도자기도 예쁠 수 있었다. 그리고 더 시간이 흘러서 이제는 깨닫는다. 


어쩔 수 없는 파괴를 겪었다면 침전하면서 솟아오를 시간을 기다리면 된다는 사실을. 살다 보니 파괴가 끝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폐기 될 뻔하다 작품으로 거듭나는 인생  스토리는 우리 인생에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붕괴될지라도, 너무 아파도 끝은 아니다.


어려운 일을 겪을 때면 나는 나를 아주 작게 만들곤 한. 남이 나를 산산조각 내기 전에 나를 티끌로 만드는 것이다. 파괴된 도자기 조각보다 더 작게, 티끌처럼 작게 미분한다. 주로 쓰는 방법은 '먼지 되기'다. 나는 어딘가에 꼭 박혀있는 먼지 한 톨이 된 나를 떠올려 본다. 


가령 책상 뒤편에 오래된 먼지라든가. 먼지가 되고 싶은 건 이 세상 무게가 때론 힘겹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숨 쉬는 것도 힘들어질 때 먼지 한 톨로 변한다. 대면해야 할 일이나 내가 만나야 하는 누군가가 버겁게 느껴질 때 눈을 감고 피하고 싶다. 하지만 사라지기엔 난 너무 크니까 먼지가 된다. 


가까운 사람들이 내 앞에서 고성으로 싸운다. 난 테이블 아래 먼지가 된다. 먼지가 되어서 조금 전까지 나와 가까웠지만 이젠 관련 없는 사람들의 싸움을 바라본다. 인간으로 존재할 때보다 마음이 덜 아파진다. 


헤어지자, 어쩔 수 없이 모진 말을 하고는 눈을 감는다. 점점 작아져서 바람에 이는 먼지가 된다. 먼지는 인간의 일과는 별로 관계 없으니까. 먼지는 가슴이 아프지 않다. 


작아질수록 장점이 있다. 만약 너무 작아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입자가 된다면 아무도 나를 쪼갤 수도 파괴할 수도 없다. 너무 작아지티끌은 사람들을 보지만 사람들은 티끌을 볼 수 없다. 먼지나 티끌은 앉은자리에서 세상 돌아가는 꼴을 관조할 수 있다. 티끌은 머리도 없어서 지난 기억도 잊을 수 있다. 티끌이 되면 인간 내가 좀 더 잘 보인다. 어딘가에 숨고 싶은데 몸도 머리도 너무 커서 그저 패닉에 빠진 나를 본다. 그러면 그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도 작아진 내가 큰 나를 관찰할 수 있다. 그러니 아플 때마다 먼지가 된다. 난 책상이나 창틀에 붙은 먼지가 된다.


작아진 나는 세상으로부터 폐기처리 된 후에도 다. 결국 난 존재할 것이다. 티끌로. 이것이 비극일지 다행일지 모르겠다. 모든 존재는 파괴된 후에도 존재한다.  존재한다.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니 내일이 두려워도 휴대폰을 끄고 숙면을 취한다. 무슨 일이 생겨도 나는 존재한다. 모양을 바꿔가면서, 때론 먼지나 티끌처럼 말이다. 티끌은 모든 일을 사소하게 만들어 주지만 무시해버릴 존재는 아니다. 내가 위대하게 여기는 사람도, 내가 무시하는 사람도 모두 우주 속 티끌이다. 티끌은 내일도 출근을 한다. 티끌은 내일도 도서관에 다.


학교 다닐 때 배운대로 점이 모여 선이 된다. 선이 모여 면이 된다. 면이 모여 공간이 된다. 파괴할 수도 없고 파괴되지도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티끌이 모여서 우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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